[이건희 별세] 멀리 보는 리더십으로 일군 '반도체 신화'
[이건희 별세] 멀리 보는 리더십으로 일군 '반도체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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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 왼쪽)이 지난달 30일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을 찾아 반도체 패키징 라인을 살펴보는 모습. (사진=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 왼쪽)이 지난 8월30일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을 찾아 반도체 패키징 라인을 살펴보는 모습. (사진=삼성전자)

[서울파이낸스 오세정 기자] 이건희 회장의 업적 중 삼성의 글로벌 기업 초석을 다진 반도체 신화를 빼놓을 수 없다.

1974년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에게 반도체 사업 진출을 건의했다. 당시 경영진들은 회의적이었지만 이 회장은 같은 해 12월 6일 사재를 털어 자금난에 허덕이던 한국 반도체의 지분 50%을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어 1977년 미국 ICII가 가지고 있던 나머지 지분 50%도 인수했으며 1978년 3월에는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했다.

고인은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뛰어넘기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 드나들며 인재 확보에 매진했다. 또 미국 페어차일드사를 여러 차례 방문해 기술 이전을 요청한 끝에 지분 30%를 내주는 조건으로 승낙을 얻었다.

1983년 12월 64kD램을 생산 조립까지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하며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10년에서 4년으로 좁히는데 성공한다. 이어 1984년에 삼성반도체 기흥 공장이 완성됐지만 반도체 사업은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1987년 취임 이후 이 회장에게 그룹 수뇌부가 반도체 사업 포기를 건의하지만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라며 당시 임원들에게 강조했다.

다음해인 1988년 반도체 시장의 불황이 마침내 끝나 256kD가격이 1.5달러에서 6달러로 치솟았다. 계열사로 있던 삼성반도체를 합병한 삼성전자는 그 해 지금까지 반도체에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반도체 개발에 가속도를 올린 결정적인 순간도 있었다. 1984년 반도체 용량을 높이기 위해 위로 쌓아 올릴 것인지(스택방식), 아래로 파 내려 갈 것인지(트렌치 방식)를 두고 고민에서 스택방식을 선택했다. 당시 D램 세계 1위였던 도시바는 트렌치 방식을 선택했다.

이 회장의 판단은 적중해 4M D램 개발 경쟁에서 선진국들과 개발 격차를 좁힐 수 있었고, 16MD램에서는 선두업체와 동시에 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

1993년 6월에는 삼성은 8인치 양산 체제를 세계 최초로 구축한다. 당시 반도체 웨이퍼는 6인치가 표준이었지만 이 회장은 생산량 확대가 용이한 8인치 웨이퍼 개발을 지시한다. 그 결과 삼성은 생산력에서 일본 기업을 월등하게 앞서며 세계 1위에 오른다. 이후 22년 연속으로 메모리 분야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시장 조사기관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상성전자의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D램 41.4%, 낸드플래시는 27.9%로 독보적 1위를 지키고 있다.

이건희 회장 체제에서만 삼성그룹의 총 매출은 1987년 취임 당시 9조9000억원에서 2014년 400조원으로 무려 40배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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