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폭군 만들기'의 역사
[홍승희 칼럼] '폭군 만들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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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먼저 국제정세를 읽고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군주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함정에 빠트리며 결국 폐위로 몰고 간 역사는 우리의 긴 역사기간 동안 결코 적지 않다. 특히 왕권을 특별히 인정하지 않고 사대부의 우두머리 정도로만 취급했던 이성계의 조선은 두 명의 왕을 폐위시켰고 독살의혹이 민간에서조차 회자되던 왕들도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독 안타까웠던 폐위 사례는 아마도 광해군이 아니었을까 싶다.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고 그의 대외정책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었다면 병자호란의 비극은 예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고 조선 후기 성리학의 화석화로 인한 여러 폐해들도 줄어들었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지나간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임진왜란 동안 도망간 본조를 대신해 전국을 순무하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병사를 모은 광해군의 노력이 없었다면 과연 두 차례의 그 참혹한 전란이 끝나고 나서도 조선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그런 광해군은 태생적 약점을 쥐고 흔드는 신료들과 자신보다 더 주목받는 자식에게 열등감을 보인 부왕 선조로부터의 견제는 즉위 과정에서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즉위 후에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미 임금이 즉위했음에도 핏덩이 영창대군과 임금보다 나이 어린 대비를 내세워 그의 보위를 위협했고 그런 저항에 맞선 결과는 결국 광해군을 함정에 빠트리게 만들었다. 그를 함정에 빠트리는 데 앞장 선 사대부 기득권세력들은 자신들의 손 위에서 놀아날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결국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요즘 한국사회의 기득권세력들이 보이는 그 논리 없는 저항들을 보며 다시 그 안타까운 역사를 상기하게 된다. 전후 복구와 국가보위라는 당면한 의무는 안중에 없이 오직 내부의 권력투쟁만이 목표였던 광해군 재임기간 중의 양반 사대부들의 모습이나 지금 팬데믹과 싸우고 그 후유증으로 닥친 국민 대다수의 심각한 생활고 따위는 무시한 채 이런저런 구실로 정부를 흔들려는 기득권세력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반대세력이야 늘 있기 마련이고 또 건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과 같이 엄중한 시국에서 벌어지는 막무가내식 저항은 어떤 명분을 들고 나섰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끝내 그 목적이 단지 정치권력을 향한 욕망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사회가 당면한 현실은 어느 면에서든 만만치 않다. 당장 발등의 불인 코로나19만 해도 누구 한사람, 어느 한 나라만 노력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모두가 전심으로 협력하고 노력해야 하는 그야말로 인류와 바이러스가 치르는 전쟁이다.

그저 말하기 편한 처지에서는 방역 3단계 대책을 실시하라는 주문도 나오지만 그건 그나마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대다수 국민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조치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많은 국민들이 더운 여름날에도 마스크를 못 벗고 어지간해서는 바깥출입도 자제하며 정부 정책에 동조하는 것도 그런 최악의 상황을 면하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그런데 굳이 대면예배를 해야 하고 많은 군중이 모여 정부 성토를 벌여야 하고 또 환자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시국에 진료거부를 하는 젊은 의사들. 그래서 국민들은 분노한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품은 종교의 지도자들이 바이러스를 고의적으로 유포시킨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정부 방역대책에 훼방을 놓는다. 오죽하면 이들을 내란죄로 다스려야 한다느니 폐기돼야 한다고 믿었던 국보법이나 테러방지법을 한번만 발동시키자니 하는 소리들이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다.

현 정부에 반대한다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은 존중한다. 민주사회에서 정치적 입장이야 저마다 다른 게 정상이니까.

다만 팬데믹 그 자체뿐만 아니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세계무역 전반이 급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앞에 두고 정부와 방역기관, 방역관계자들은 물론 모든 국민들이 그야말로 조심조심 상황을 다스려나가는 와중에 전염병을 퍼트리면 정부가 흔들릴거라는 욕망으로 상황을 그르치는 그 몰상식과 이기심에 더 이상 그들의 요구를 존중해줄 수가 없다는 대중의 분노는 그들의 신념보다 더 존중받아 마땅하다.

정부를 흔들기 위해 나라를 거덜 내려는 욕망들을 묵인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포용 범주를 이미 넘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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