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워치④] 한국 경마 100년, 시작은 '당나귀 경주'
[공기업워치④] 한국 경마 100년, 시작은 '당나귀 경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대 경마 시발(始發) '전선경마대회'
승마 대중화로 국민마사회 인식전환
부산경마구락부.(사진출처=부산역사문화대전 홈페이지)
부산경마구락부.(사진출처=부산역사문화대전 홈페이지)

[서울파이낸스 윤은식 기자] 1898년 관립외국어학교 연합운동회에서 육상경기 종목으로 학생들이 당나귀를 타고 경주한 것을 우리나라 경마의 효시로 본다. 이후 말을 타고 경주하는 완전한 경마 형태를 갖춘 때는 1921년 서울 용산에 있는 경성승마구락부가 개최한 '전선경마대회'가 최초다.

경성승마구락부는 1913년 조선총독부관리들과 조선주둔 일본군 지휘관들이 서울 수표동에 마술연습소를 개소한 것이다. 이후 관·군 중심에서 민간인 주도 단체로 바뀌고 사업가인 일본인 아라이가 구락부 운영을 맡으면서 구락부 사업으로 경마대회를 개최하게 됐다.

전선경마대회는 일본군 신연병장(용산 미군기지터)에서 조선군사령부와 총독부 경무국 후원으로 열렸다. 당시 대회에는 대구와 평양 및 일본 규슈지방의 경주마 약 100두가 출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경성승마구락부는 1922년 5월 20일 조선총독부에 사단법인 조선경마구락부의 설립 인가를 신청하고 1922년 4월 5일 인가를 받는다. 비록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 물품 수탈이 목적이었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에 설립된 최초의 경마법인이자 마사회의 모태다. 마사회는 이날을 1995년부터 '경마의 날'로 지정하고 매해 기념하고 있다. 2022년이면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조선경마구락부는 1942년 조선마사회가 설립되기까지 경마를 주관하게 된다. 조선경마구락부가 생기면서 현재 경마 시스템과 같이 마권을 구매해 경마에 돈을 걸 수 있게 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지정된 경주에 투표해 순위를 맞춘 사람에게 상품권을 지급하는 형태였다. 

조선경마구락부 설립을 시작으로 1924년 평양, 대구, 신의주, 부산, 군산 등에서도 경마구락부가 설립됐다. 당시 경마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열린 것이 아니라 일본 경마 방식처럼 순번을 정해 계절별로 돌아가면서 경마가 열렸다.

1945년 해방 직후 조선마사회의 경영권은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이전되는데 명칭을 한국마사회로 변경하고 초대 회장에 나명균 씨가 임명됐다. 이후 한국전쟁 발발로 경마가 중단됐다가 1954년 뚝섬 서울경마장이 열리면서 경마가 재개됐다.

우리나라 경마는 60년대와 7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68년에는 한국, 미국, 호주, 일본 등 국가가 참여한 제1회 아시아 국제 친선경마대회를 개최, 1970년에는 아시아 경마협회에 가입하는 등 국제적인 인지도를 쌓았다.

경마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르네상스 시대를 연다. 굵직한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 두건을 치르면서 한국경마는 승마시설 및 장비의 현대화를 이뤘고 덩달아 승마산업 발전으로 이어져 국내 승마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마사회는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경마 임시 휴장을 9차례나 결정한 탓에 창립이후 최대 경영난에 직면해 있지만, '국민의 마사회'를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마사회는 이를 '승마의 대중화'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관련기사

이 시간 주요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