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00년 기업] ②동화약품 "생명 존중 경영철학"
[한국의 100년 기업] ②동화약품 "생명 존중 경영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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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자금부터 국민 살린 활명수···'제약 보국 정신' 장수 비결

[서울파이낸스 윤은식 기자]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 궁중 선전관이었던 노천(老川) 민병호 선생은 누구나 쉽게 상용할 수 있는 양약의 필요성을 느끼고 궁중비방에 서양의학을 혼합해 우리나라 최초의 양악인 '활명수'를 만들어냈다. 당시 약이라고는 약재를 달여먹는 탕약이 전부였고 그마저 구하지 못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 활명수는 이름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다.

같은 해 민병호 선생의 아들인 은포 민강 선생은 서울 순화동 5번지에 '동화약방(지금의 동화약품)'을 설립하고 우리나라 최초 신약인 활명수의 제조·판매를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제약업 시작의 초석이다. 그의 나이 14세였다. 

동화(同和)라는 상호는 주역에 나오는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예리함이 쇠도 자를 수 있다. 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평안해진다"는 뜻이다. "종이와 대나무가 서로 합하여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의 "紙竹相合 生氣淸風(지죽상합 생기청풍)"에서 따왔다. 동화약방은 좋은 약을 만들어 사회에 봉사한다는 제약 보국의 기업가 정신으로 창업됐다. 

민강 선생은 1910년 국내 최초로 부채표 활명수를 상표 등록했다. 이후 활명수는 소화제로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며 동화약품을 이끌게 된다. 당시 활명수 1명(60ml) 값은 50전이다. 50전이면 당시 국밥 두 그릇을 사 먹을 수 있는 돈으로 값싼 약은 아니었다.

민강 선생을 놓고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민강 선생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조달하는 서울 연통부의 행정 책임자였다. 민강은 활명수를 팔아 독립자금으로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동화약품이 의로운 민족기업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서울 서소문동(덕수궁 롯데캐슬) 동화약품 옛 본사 건물 앞에는 '서울 연통부 기념비'가 있다.

(왼쪽부터) 창업주 민강 선생, 보당 윤창식 동화약품 5대 사장, 가송 윤광렬 동화약품 7대 사장.(사진=동화약품 소개자료)
(왼쪽부터) 창업주 민강 선생, 보당 윤창식 동화약품 5대 사장, 가송 윤광렬 동화약품 7대 사장.(사진=동화약품 소개자료)

동화약품이 10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비결은 오로지 한 분야에만 집중한 '생명존중의 한 우물 전략'이 장수 비결로 꼽힌다. 122년간 같은 상호로 같은 제품을 생산·판매하고 있는 동화약품은 대한민국 최초의 등록상표 '부채 표'와 최장수 의약품 '활명수' 등 4개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민강은 독립운동으로 두 차례에 걸친 옥고로 1931년 순국했다. 민강 선생이 순국하자 임직원들은 (주)동화약방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민강의 뜻을 이어받아 운영해갔지만 사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그러다 1937년 민족기업가 보당 윤창식 선생이 인수한다. 활명수가 전성시대를 구가한 것은 이때부터다.

윤창식 선생은 1936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동화약품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동화약품의 제 2창업을 이뤄냈다. 당시 윤창식 선생은 "좋은 약을 만들어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동화의 창업이념은 어떤 시대적 불운 속에서라도 반드시 지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동화약품 재건에 노력했다.

윤창식 사장은 해방 이후 동화약품의 경영정상화에 몰두하며 1948년 적극적인 생산 판매로 의약품 생산을 10여 종으로 넓히는 데 성공한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도 피난지 마산에서 생산 판매를 계속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62년 동화약품공업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한다.

윤창식 선생은 평소 임직원들에게 "약을 만들되 생명을 살리는 약"만 만들라고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동화약품이 모기약 홈키파를 만들 때 논란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벌레를 죽이는 약을 만드는 것은 윤창식 선생의 뜻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임직원들의 설득으로 겨우 홈키파를 개발할 수 있었다고 알려진다.

윤창식 선생은 1963년 유언으로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마라. 동화는 동화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서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는 말은 남긴다. 이 유언은 윤창식 선생의 아들 윤광렬이 4가지 동화정신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경영철학으로 삼는다.

4가지 동화정신은 "첫째, 동화는 좋은 약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봉사하고 그 효험을 본 정당한 대가로 경영되는 회사이다. 둘째, 동화는 정도(正道)를 밟고 원리원칙에 의하여 경영되는 회사이다. 셋째, 동화는 젊어서 정당하게 땀 흘려 일하고 노후에 잘 살아 보려는 동화식구의 회사이다. 넷째, 동화는 동화식구가 업무수행 중 잘못이 있을 경우 이를 솔직히 시인할 줄 알고 고쳐서 전화위복이 되게 하는 회사이다"등이다.

가송 윤광렬 사장은 1973년 7대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는 일본을 벤치마킹해 제품생산의 자동화를 도입했다. 21세기형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1949년 동화약품에 입사한 그는 1967년 까스활명수를 개발해 제품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70~80년 산업화 물결로 기업이 사세 확장을 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동화약품은 소위 '돈 되는 사업'에 한눈팔지 않고 제약 한 분에만 집중했다. 국내 최초로 생산직 사원에 월급제를 도입한 것도 동화약품이다. 1978년 생산직에 적용하던 시간제 급여 대신 월급제로 급여 체제로 바꿨고 이는 국내 기업은 물론 노동계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윤광렬 사장은 이런 혁신으로 동화약품을 글로벌 제약기업으로 성장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화약품이 122년 간 국민 소화제로 명맥을 이어오는 것은 생명존중 창립이념을 바탕으로 제약 보국의 기업가 정신을 지켜온 것이 장수비결의 성장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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