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4주년] 유한양행·동화약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재조명'
[광복 74주년] 유한양행·동화약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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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왼쪽)와 동화약품 초대 사장 민강 선생. (사진=각 사)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왼쪽)와 동화약품 초대 사장 민강 선생. (사진=각 사)

[서울파이낸스 김현경 기자]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유한양행과 동화약품이 주목받는다. 두 제약사 창업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은 물론 직접 전투에 참여하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힘썼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인식이 굳건하던 때였다. 그러나 두 제약사 모두 100년 장수기업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유일한 박사, 항일무장독립군 창설 주도

유한양행 창업자 고(故) 유일한 박사는 기업인으로 잘 알려졌지만,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유 박사는 미국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낼 때부터 조국 현실에 눈을 떴다. 14살 때 독립을 위해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독립선언서가 발표됐던 1919년, 24살 대학생이었던 유 박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인 대표로 결의문을 낭독했다.

1926년 한국으로 돌아와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 박사는 1938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펼쳤다.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집행부에 가담했고, 이듬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들로 무장한 맹호군을 창설했다.

독립운동 정점은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임한 '냅코 작전'이다. 유 박사는 1942년 미육군전략처(OSS)에서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3년 뒤 OSS 비밀 침투작전인 냅코 작전에 공작원으로 입대하게 된다. 한국인을 국내로 보내 정보를 수집하고, 무장 유격 활동을 펼치려는 작전이었다.

유 박사는 50살 나이에 청년도 힘들다는 공수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15일 광복으로 이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을 신성한 말로 서약해야 한다'는 말을 몸소 실천한 애국애족 정신은 지금까지도 교훈을 남기고 있다.

그는 1971년 3월11일 작고할 때까지 유한학원과 유한재단을 통해 기업이윤을 사회에 돌려주고 봉사활동에 앞장섰다.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기업인으로 존경받는 이유다. 유한양행은 올해로 창립 93주년을 맞았으며, 매출액 기준 국내 1위 제약사로 자리매김했다.

◇ 민강 선생 '활명수' 팔아 독립운동 지원

동화약품 초대 사장 민강 선생도 나라를 되찾기 위해 힘쓴 것으로 유명하다. 민강 선생은 1909년 청년들을 중심으로 대동청년당을 결성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서울 연통부 행정 책임자였던 민강 선생은 이곳을 국내 독립운동 거점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서울 연통부는 국내에서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 단체다. 민강 선생은 소화제 '활명수'를 팔아 얻은 수익으로 임시정부에 자금도 댔다.

동화약품은 민강 선생을 포함해 독립운동가 3명을 배출한 기업이기도 하다. 5대 사장 윤창식 선생, 윤광열 명예회장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서 명실상부한 '민족기업'으로 인정받는다.

동화약품은 최장수 제약기업으로 올해 창립 122주년을 맞았다. 회사는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마라. 동화는 동화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는 윤창식 사장 경영철학을 오늘날까지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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