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제주4.3평화공원의 모녀상
[홍승희 칼럼] 제주4.3평화공원의 모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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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여러 차례 들러도 일부러 4.3의 흔적을 찾은 적은 없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적(?)들을 지나다니다 맞닥뜨리지 않는 한 그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을 글로 보는 것이 아닌 눈으로 직접 확인할 만큼의 대담함 혹은 뻔뻔함은 없었던 까닭이다.

이번엔 아픈 딸과 함께 힐링을 기대하며 조금만 움직이는 여행을 꿈꿨고 또 근래 필자의 개인 관심사인 고대사와 신화 대신 아픈 현대사를 직면하자고 맘먹었다. 4.3평화공원 조성 과정에서 일부이긴 하나 제주도민들이 이룬 화해의 힘에 상당한 의지가 된 덕이기도 하다.

이 공원 내에서 기념관 내의 시청각 자료들이 직접 전해주는 고통의 역사도 물론 생생하게 느껴지겠지만 필자 개인의 느낌으로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낱낱이 새겨 넣은 각명비가 더 크게 가슴을 울렸다. 그 각명비에는 제주4.3사건의 쌍방인 토벌군과 무장대 측의 희생자 명단이 모두 새겨졌다고 했다.

각명비에 새겨진 이들 중에는 80 노파가 있는가 하면 한두 살 어린 아기들도 여럿이다. 전체 추정 희생자 2만5천~3만 명 가운데 그나마 신원확인이 가능해 각명비에 이름을 남긴 1만4천여 명. 그 가운데 열 살 이하가 다 몇 명인지 일일이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어서 훑어보는 내내 울컥울컥했다.

그 가운데는 미처 호적에도 오르지 못하고 죽어 ‘000의 자’로 이름이 오른 아기들도 있다. 아예 아무개의 자1, 2로 이름이 오른 한 살과 세 살짜리 자매도 있다.

유아사망률이 높아서이기도 하고 부모가 법률적 지식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정부수립 후 제도가 정비될 때까지 제때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실제 나이와 몇 살씩 차이나는 사례들도 흔하니 각명비의 그 아기들과 그 부모가 특별한 예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 아기들에게 무슨 이념이 있었을까 다시 되묻는다.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 아닌가.

현재 밝혀진 바로는 1947년 경찰의 발포로 인해 민간인 6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가뜩이나 어설픈 미군정의 정책실패로 뒤숭숭하던 제주민심을 들쑤셨고 그에 반발한 민심이 남로당의 48년 총파업에 동조하면서 확대에 확대를 거듭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애초 경찰의 발포 원인이 참 애매해 보여 음모설을 낳을 소지조차 있지만 그 이상 추정은 무리일 듯하다.

어떻든 친일`반일의 감정적 골이 얼마나 깊은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단순히 정령군으로서의 치안유지에만 골몰했던 미군정과 현지 주민들의 희생에는 아랑곳 않고 그들의 분노만을 이용했던 남로당 무장대. 그들의 충돌에 비무장 민간인들까지 무장대로 간주되며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하지만 토벌군이든 무장대든 실제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에서 희생된 이들은 오랜 세월 한 고장에서 얼굴 맞대고 살아온 ‘동네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 사건이후 수십년을 여전히 한 동네에 살면서도 서로 집안끼리도 얼굴 마주보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들었다.

이웃집 아무개네는 경찰이었다가 무장대 손에 죽었고 또 그 옆집 뉘기네는 무장대에 목덜미 잡혀 식량 운반하다 토벌군의 총 맞아 죽었고 또 그 곁의 누구네는 까닭도 모른 채 한곳에 모이라는 소집에 응했다가 갓난애와 함께 처형당했다.

그들 가운데 한 여인은 두 살짜리 딸을 품에 안고 총에 맞은 채 달아나다 몇 걸음 못가서 쌓인 눈 속에 얼어 죽었다가 여러해가 지나서 발견됐다고도 했다. 그 얼어 죽은 모녀의 마지막 모습을 재현한 동상을 보는 것도 참 가슴 아린 일이다.

6.25가 나고 제주도에 대한민국 최초로 제1육군훈련소가 문을 열었다. 그 훈련소 근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부모님 덕에 필자는 모슬포에서 생겨나 논산 제2훈련소 근방에서 태어났다.

그때 어머니가 본 한라산 빨치산의 겉모습은 그저 한복 입고 수더분해 보이는 그저 그런 시골사람이었다고 했다. 어느 날 눈을 들어 보게 된 한라산. 그 곳으로 올라가던 상여가 토벌군의 습격을 받았고 보니 쌀자루가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토벌군 입장에선 적에게 식량 공급하는 그들이 그냥 한패였겠고 토벌 당한 쪽에서는 가족이 혹은 이웃 중의 누군가가 산속으로 쫓겨 들어갔으니 거둬 먹이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을 그 때의 혼돈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 혼돈의 기억을 대체 언제까지 ‘풀지 않고’ 계속 이어가기만 하려는지 안타까운 세대들의 목소리는 아직 우렁차다. 화해는 이제 막 제주도 그 피해자들 속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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