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던 ESS
[기자수첩]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던 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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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김혜경 기자]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간의 사고체계는 시스템1과 시스템2로 구성돼있다고 설명한다. 시스템1이란 반사작용·직감·충동을 포함한 '빠르게 생각하기'를 뜻하며 시스템2는 집중·신중·계획으로 표현되는 '느리게 생각하기'다.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시스템1과 2가 모두 필요하지만 종종 두 가지 시스템은 충돌한다. 1은 빠르고 2는 느리다. 1은 편하지만 2는 불편하다. 느린 이성인 2를 써야할 때 우리는 빠른 1을 사용한다. 

첨단 기술과 관련된 정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진흥 정책이 있다면 규제 정책은 필수다. 규제를 무조건 '악'으로 규정짓는 프레임에 맞서 '안전'이라는 단어로 바꿔보자. 시스템1이 진흥이라면 시스템2는 안전이다. 전자는 합리적인 것으로 중요시되고, 후자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도외시되는 경향이 있다. 정작 시스템2가 필요할 때 1을 사용한다면 과연 합리적일까. 안전을 배제한 기술만을 추구할 때 오히려 비합리적이다. 시스템1과 2가 융합된 상태는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이다.

에너지저장장치(ESS)는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의 핵심이다. 에너지전환 로드맵에 따라 재생에너지 발전비율을 오는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려면 ESS 없이는 힘들다. '전기를 담는 그릇'인 ESS는 전력을 배터리에 저장함으로써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 출력을 고르게 만들어 안정화시킨다. 

휴대폰, 노트북을 비롯해 보조배터리까지 생활필수품이 된 현실이다. 향후 ESS도 흔한 설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생각해보자. 어느 날 당신의 IT기기에서 연기가 발생한다. 서비스센터에서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고 한다. 새것으로 바꿔주긴 했지만 뭔가 찜찜하다. 계속 써도 될까. 잠시 동안 사용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평생 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IT 의존도가 높은 21세기. 휴대폰이 안전을 위협하는 무기로 돌변해도 가슴을 졸이며 써야한다. '설마'의 마음가짐으로 운을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일단은 회피가 답이라는 것이다. 

최근 ESS 화재 사고와 정부의 움직임이 이와 비슷하다. 지난 2017년 8월부터 현재까지 집계된 사고는 총 21건. 불이 난 ESS 가운데 일부 사전 안전성 검사를 통과했음에도 사고가 났고, 정밀안전진단을 마친 사업장 일부에서도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여름 산업통상자원부와 업체·관계 기관들은 당시 사고가 난 ESS를 대상으로 현장 조사를 실시했음에도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고, 11월 말부터는 산업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 주도로 정밀 안전진단에 돌입했다. 7월 조사 결과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기자가 산업부에 7월 조사 결과를 질의하자 "당시 에너지안전과와 에너지신산업과가 공동으로 진행했다"면서도 "이제 국표원에서 총괄하니까 추후 발표 여부에 대해서는 그곳에서 결정하는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업부는 옅어진 반면, 산하기관인 국표원은 두드러졌다. 하지만 올해 1월 출범한 ESS 사고조사위원회 위원 명단에는 에너지안전과 등이 버젓이 포함돼있다. 일각에서는 정책 중요도가 수소 경제로 넘어가면서 산업부 소속이지만 산하 연구기관인 국표원이 곤혹스러운 문제를 떠맡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냥 업무 분장의 효율을 위해서라고 여기고 넘어가야 할까? 보급보다 화재 원인 규명이 중요하기 때문에 국표원으로 넘겼다면 지난 정부에서 ESS 보급을 주도했던 산업부 직원들은 이번 ESS 문제 해결에 과연 진땀을 빼고 있을까. 

지난 2011년 지식경제부는 'K-ESS 2020' 계획 수립을 시작으로 ESS 정책을 발표했다. 이후 2013년에는 창조경제 에너지 수요관리 신시장 창출방안에 따라 한국전력이 ESS 종합추진계획을 수립했다. 2017년까지 500MW 규모의 주파수조정용 ESS를 17개 변전소에 설치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2014년 10월 한국 최초 주파수조정용 ESS 프로젝트 시범사업이 서안성변전소와 신용인변전소에서 착공됐고, 이듬해에는 52MW 규모의 시범사업이 준공되고 상업운전이 시작됐다. ESS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거듭했다. 2013년 28MWh에서 2015년에는 239MWh 규모로 뛰었다. 2016년 2월 산업부가 발표한 전력분야 10대 프로젝트에 ESS 지원 강화안이 포함되면서 2017년 625MWh, 지난해 6월까지 1182MWh로 늘었다.

당초 ESS 보급 취지가 왜곡되면서 전력 요금 혜택에만 기업들이 몰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는 지난해 국정감사 때도 박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등 몇몇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우선 피크저감용 ESS 설치 시 사업주는 최대 50% 할인 혜택을 받는다. 가동 후에는 요금이 저렴한 경부하 시간대에 충전을 해 요금을 할인받고, 요금이 비싼 피크 시간대에 사용해 사용요금 절약과 피크감축량에 따른 기본요금까지 할인받을 수 있다. 결국 무리한 보급량 확대가 화를 부른 것이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는 본래 목적에 충실해야 함에도 말이다. 

최근 김규환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에너지기술평가원에서 입수한 ESS 화재 관련 회의록에 따르면 '서지(Surge·과도한 전압·전류으로 인한 이상 상태)'를 막지 못한 운용시스템 문제가 ESS 사고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이보다 회의록에서 주목해야할 곳은 제도가 미흡했다는 부분이다. 

첫 번째 ESS 설치 시 각 구성요소에 대한 시험은 하고 있지만 계통연계와 과충전·방전에 대한 시험은 없으며 성능중심 평가만 시행되고 있다는 점, 두 번째 과충전·방전·전류, 배터리 자체 등 ESS 안전점검 시험방법에 대한 기준 확립이 필요하다는 점. 세 번째 블록화된 단위 배터리 셀 성능 시험방법 표준과 설계기준이 미흡하다는 점, 네 번째 전력변환장치(PCS)와 배터리제어시스템(BMS)이 과전류에 대해 잘 반응하는지 검증해야 하지만 현재는 테스트할 방법이 없다는 점 등이다. 

ESS 성능시험 표준제도는 지난해 말 완성됐지만 안전 관련 제도는 현재 제정 중인 단계다. 양적 보급이 늘어나는 동안 선행돼야 할 안전 제도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화재 사고는 이미 예견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에너지전환의 성공을 위해 ESS 사고를 국가 재난 수준으로 인식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정부는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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