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다양성과 창의성은 한 뿌리
[홍승희 칼럼] 다양성과 창의성은 한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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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일어난 청소년들의 끔찍한 집단폭행 사건이 끝내는 폭행치사 혹은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며 사회적 충격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인천 중학생 사망사건은 아직 법적 판단이 내려지기 전이지만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배타주의적 분위기가 청소년들에게 미친 악영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 또 다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산업의 미래는 창의성의 계발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시스템은 창의성을 기르기보다 획일적 답 찾기에 매몰돼 있다. 그러나 교육시스템만 탓할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획일주의를 효율성이라는 미명으로 옹호하는 분위기다. 한동안 인구에 회자됐던 ‘우리가 남이가’라는 낯부끄러운 정치 구호가 지역주의의 산물로 튀어나왔지만 그런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은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퍼져있다.

집단주의는 필연적으로 배타성을 띠게 된다. 나와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것이 나와 무언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으로 드러나면 종종 폭력이 따른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우려해야 할 문제가 된다.

그 폭력이 꼭 물리적 폭력만을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감정적 불안정성이 높은 청소년들의 경우 물리적 폭력이 나타나기 쉬울 뿐이지 실상 언어적, 정서적 폭력들은 성인들의 사회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그런 폭력은 늘 소수자, 사회적 약자가 피해자가 된다는 점에서 참으로 비겁한 행위이지만 그런 폭력을 가하는 집단 구성원들은 그런 의식조차 희미한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여성노동자들이 직장 내에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남성적으로 변하기를 요구받지만 막상 그렇게 변화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또 다시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비난이 따라붙었다.

요즘은 그런 이중성이 많이 약화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낮은 급여, 낮은 직급에만 머무는 여성노동자들이 많다. 여권신장이라는 말조차 고리타분해 보일 정도로 여성 발언권이 높아진 듯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변화는 아주 미미하게 진행될 뿐이다. 그나마 이런 성과는 일제시기부터 시작된 여성운동이 장기간 투쟁해온 성과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장애인들은 여전히 노동시장에서 차별이라는 말조차 과분할 정도로 거의 외면당하고 있다. 장애인들의 권익을 위한 운동이 시작된 시기가 늦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들과의 동행을 낯설어 하는 것을 넘어 힘들어 한다. 함께 하는 훈련이 전혀 돼있지 않은 탓도 있지만 ‘효율’만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탓이 더 크다.

외국에서도 한국인의 ‘빨리빨리’ 습성을 익히 알고 한국인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지만 그 습성이 본래 우리의 특성은 아니었다. 산업화 이후 잔혹한 노동환경이 만들어낸 슬픈 결과물일 뿐이다.

이런 특성을 우리사회는 꽤 자랑스러워하고 해외에 나가 사는 교민들은 현지 적응시 제일 힘들어 하는 게 그들의 느린 일처리라고도 털어놓는다. 효율에 길들여진 탓에 안전을 위한 더딘 일처리를 답답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런 빨리빨리 증후군과 효율지상주의가 결국 우리 사회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안전사고로 이어지고 당연히 있어야 할 일자리들을 없애버리기도 한다.

80년대 이후 효율적 인력관리 모델인양 등장해 신자유주의가 교조적으로 신봉되며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늘어나기만 하는 하청, 재하청 문화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도 결국 끊임없이 안전사고를 발생시키며 애꿎은 목숨들을 앗아가고 있다. 그러나 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차별을 불러일으키며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키는 심각한 이 문제의 해결은 경기에 발목 잡힌 채 쉽사리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 노조와 하청, 재하청 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해법은 그리 간단히 찾아질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이제 백만 가구를 넘어선 다문화가정의 외국인 배우자와 혼혈 자녀들에 대한 법과 제도를 넘어선 사회 정서적 차별 또한 단기간에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그 대상자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힘든 어린이`청소년 자녀들인 경우 그 또래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사회가 제 역할을 못하는 문제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사회 속에서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을 촉구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는 아니지 않은가. 함께 사는 법을,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교육이야말로 다양성 사회로 나아가며 우리의 아이들을 창의성 있는 인재로 키워내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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