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 칼럼] 먼 목표와 발밑의 함정
[홍승희 칼럼] 먼 목표와 발밑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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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인으로부터 그 집안 어른의 자서전 한권을 선물 받았다. ‘강기동과 한국반도체라는 제목 자체가 일단 관심을 끈다. 지금은 삼성반도체를 필두로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는 강국이라 자부해도 지나치지 않을 위치에 오른 한국이지만 그 초창기 조립생산 단계를 넘어 반도체 제조공정의 여명기를 열었던, 그러나 잊혔던 그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책 앞부분은 여느 자서전이 그러하듯 유년시절의 추억들이 실려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해방을 맞고 해방공간을 대구에서 지낸 탓에 대구 10월 폭동을 직접 집이 털리는 것으로 경험하고도 보복이 두려워 서울로 옮긴 개인사 속에 담긴 역사 이야기나 이후 6.25로 이어지는 당시대인들의 공통 기억들이 두루 담겼다.

하지만 그보다는 해방공간에서 비로소 만나게 되는 당대로선 신기하기만 했던 전기축음기나 진공관 앰프를 통해 듣는 방송과 같은 하이테크의 추억들을 통해 공대를 가고 반도체를 만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런 유년부터 청년시절까지의 이야기 속에도 암담해 보이는 사회 속에서 새로운 문물을 찾아 헤매는 젊은 영혼을 보며 희망의 싹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유학중에 반도체를 만나고 모토로라에 재직하면서 한국 땅에 반도체의 미래를 꿈꾸고 실천하다 좌절하는 얘기들이다. 그 대목들을 보다보면 초장부터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땐 그랬었지 싶은 얘기들 속에 세계적 기술의 경향을 읽지 못한 채 의욕만 넘쳤던 정부와 그 속에서 읽히는 사욕들, 그리고 그 사욕들로 인해 앞선 지식과 정보를 가진 젊은 관료들이 겪어야 했던 좌절까지 직접 표현되지 않은 당시의 분위기를 보며 역사의 반복성을 거듭 상기하게 된다. 조선이 개항하고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20년 만에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과정도 그와 제법 흡사하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과연 그런 반복성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그 당시에 비하면 유통되는 정보의 양과 질이 엄청나게 발전한 듯도 싶지만 여전히 우리는 세계사 속에서 중심부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런가 하면 멀리 역사를 내다보는 이 따로, 발밑의 물웅덩이 들여다보는 이 따로 저마다의 판단만을 목청껏 외쳐대며 세계사의 흐름을 왜곡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안타깝기도 하다. 숲과 나무를 두루 봐야 하듯 먼 곳에 둔 목표와 발밑의 위험도 아울러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라도 알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실천하긴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국가를 이끌겠다는 정치권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해야만 한다. 그런데 불안하게 한다.

진보와 보수의 진정한 차이는 바로 그 균형추가 어느 쪽으로 좀 더 기울었느냐로 결정될 것이다. 진보가 먼 곳의 목표에 좀 더 집중한다면 보수는 발밑의 위험에 더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해도 정치를 하려면 그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어서는 곤란하다. 집중의 정도, 기울기의 문제다. 지금 한국 정치는 고개 들지 말고 발밑만 보라는 야당과 목표를 향해 더 빨리 가지 않는다고 다그치는 노동계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성급한 요구가 뒤엉키며 정부를 뒤흔든다.

최근 정부는 일부 개각을 단행했다. 특히 갈등설로 말 많았던청와대 정책실장과 경제부총리를 한꺼번에 바꿨다. 그러면서 청와대는 그 둘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지었다. 경제부총리는 당면한 현안을 주도적으로 해결하고 경제수석은 국가의 먼 목표를 갖고 청사진을 만들 것이라고.

그런다고 그 구분이 늘 딱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정치와 경제가 공존하는 그림으로는 그만하면 꽤 그럴싸하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대계를 그리는 쪽과 당면한 현실과 맞서 싸우는 쪽이 공존하고 협력하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문제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꽤 긴 시간동안 공유할 목표를 잃어버렸지만 그에 걸맞는 다양성의 확장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갈등=파국이라는 이상하리만치 단세포적인 결론을 쉬이 끌어내곤 호들갑떠는 문화로 바뀐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첨병은 뉴스를 생산, 가공, 판매하는 언론이다. 언론 스스로가 사회 역사적 관점에서 장기적 비전을 이해할만한 상상력이 결핍된 탓에 사회가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소해나가는 사례를 만들어낼 때까지 기다릴 인내심도 결여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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