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독립에 등불 된 의로운 기업···LG·GS·유한양행
민족 독립에 등불 된 의로운 기업···LG·GS·유한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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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되찾고 겨레 살리는 것에 힘을 보태는 것이 나라 돕는 일"
유일한 박사가 지난 1968년 유한양행이 모범 납세업체로 선정돼 동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는 모습.(사진=유한양행 홈페이지 갈무리)
유일한 박사가 지난 1968년 유한양행이 모범 납세업체로 선정돼 동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유한양행 홈페이지 갈무리)

[서울파이낸스 윤은식 기자] 매해 광복절이 되면 주목받은 기업이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을 무색하게 만들면서 국내 경제를 이끄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경영하는 LG·GS·유한양행 등이 그 주인공이다.

연암(蓮庵) 구인회 LG 창업주는 1942년 중경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찾아온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 1만원(현재가치로 환산 시 약 7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추정)을 쾌척했다.

당시 구 창업주는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자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태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돕는 일"이라 생각해 위험을 감수하고 결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조부인 효주 허만정 선생은 백산 안희제 선생이 사업을 벌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자는 제안을 받고 흔쾌히 동참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백산상회는 독립운동 자금의 절반 이상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다.

효주 선생은 백산 선생과 최태욱, 이종화 등 민족기업인들과 백산무역 회사를 세워 전국 거점도시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감시로 1927년 문을 닫게 된다.

'기업은 나라와 민족의 것이고 국민의 소유'라는 경영원칙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유일한 박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보여준 유일한 인물이다.

유 박사는 1895년 평양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 박사의 부친인 유기연은 재봉틀 대리점을 운영해 쾌 큰돈을 벌었다. 유기연은 1910년 일제의 강제병탄조약이 체결되자 가족을 이끌고 간도로 넘어 독립당의 재정 후원을 맡았다.

유기연은 당시 아홉살이던 유일한을 미국인 선교사를 통해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유일한은 대학에서 법학과 상경을 수학한 뒤 동양인 최초로 제너럴일렉트릭(GE)에 입사했다.

유 박사는 1926년 귀국해 서울 종로 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한양행은 일본 제약회사를 따돌리며 조선 최초의 제약회사로 올라섰다. 그러자 일제의 집요한 감시가 시작됐다. 그가 미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전력 때문이었다.

그는 1930년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일제 말기인 1942년 '재미한인'으로 이뤄진 '한인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했고, 1945년 미군 전략정보처 'OSS(현재 CIA의 전신)'의 '냅코작전'(재미한인들을 훈련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는)에 참가하기도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뜻을 기리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지원하는 기업도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 사위인 김호연 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빙그레가 그 주인공이다.

재단법인 김구재단은 1993년 12월 29일 김 회장이 사재 112억원을 출연해 설립한 비영리 공익법인이다. 국내·외 학술연구 단체에 대한 지원사업과 초중고, 대학생에 장학금 지급사업을 중점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김 회장은 미국 하버드 대학교 한국연구소에 '한미 관계 김구 포럼'을 개설했고, 미국 브라운대학교 왓슨국제연구소에 김구 도서관을 개소했다. 또 이봉창 의사 기념사업회 등 다양한 독립단체를 돕고 있다.

일제의 금융침탈에 맞서 세워진 금융기업도 있다. 고종은 일본이 조선 자본을 찬탈하기 위해 은행을 설립을 난립하자 이에 맞서기 위해 황실 자금으로 '대한천일은행'을 만들었다. 지금의 우리은행이다. 대한천일은행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과 독립운동 자금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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