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10만 년 후 현대 문명의 유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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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김혜경 기자] SF고전영화 <스타워즈>에는 '데스 스타(Death Star)'라는 대량살상무기가 등장한다. 우라늄 대신 카이버크리스털을 핵반응로(원자로)에 넣고 핵분열 과정에서 방출되는 X선이 행성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작동 원리도 현실의 '무엇'과 흡사하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방사성 입자 붕괴열과 폐증기 등 핵폐기물 처리 문제는 영화 속 가상 세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폐기물 방출 방법을 둘러싸고 설계자들은 골머리를 앓는다. 몇 가지 방식 가운데 핵반응로와 배출구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불안정한 설계가 채택된다.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공사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이유가 컸기 때문. 결국 주인공이 배출구에 쏜 어뢰가 연쇄 반응을 일으켜 구조물 전체가 폭발해버린다. 21세기 현재 지구도 마찬가지. 일반인들에게 단어조차 생소한 '사용후핵연료' 등 핵폐기물 처리 문제는 핵발전소(원자력발전소) 운영의 '아킬레스건'이다. 

1978년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현재 국내 각 발전소 내에는 최소 10만 년간 고(高) 선량의 방사선을 내뿜을 폐연료봉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중수로인 월성의 경우 오는 2019년 하반기 건식저장 포화를 앞두고 있다. 1호기 폐쇄로 그나마 시점이 늦춰진 것. 경수로 고리·한빛·한울도 몇 년 안으로 가득찰 예정이지만 현재 영구 처분장은커녕 중간저장시설도 없는 실정이다. 폐연료봉과 함께 각 본부가 보관 중인 중준위방폐물도 현재 기술로는 안전하게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어 경주 중·저준위 처분장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방사성폐기물 관리법에 따라 한국수력원자력이 사용후핵연료 관리비로 적립한 금액은 현재까지 4조7384억원이다. 이 같은 처리 비용조차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수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총 9조6465억원의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비가 발생했고, 향후 처리장 건설·운영에는 64조1301억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됐다. 추산비용 또한 2년 주기로 재산정되기 때문에 이후 추가 예산이 소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한수원은 핵폐기물 관리비의 경우 현 시점에서 산정이 불가하다고 밝혔다. 

폐연료봉이 기약 없이 임시 저장되고 있는 상황을 두고 시민단체는 '핵발전소는 화장실 없는 아파트'라고 지적해왔다. 옮길 외부 공간 자체가 없기 때문에 생활공간 한 켠에 칸막이를 만들고 쓰레기를 임시로 쌓아두는 셈. 방폐물 관리를 장기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발생량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발전소를 계속 늘려도 좋은지 등 전 국가적 차원의 대책 부재는 현재까지도 후유증을 낳고 있다. 우라늄 채굴부터 농축·운송과 발전소 가동 과정을 거쳐 폐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정을 관리해야 함에도 오직 발전소 늘리기에만 치중, 이후 문제는 '나 몰라라'한 탓이 크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5월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 재검토 준비단을 발족하고, 박근혜 정부 당시 졸속 합의된 공론화위 권고안에 대해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향후 진행될 공론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전 국민적 관심 사안이 되어야 한다는 것. 막말로 전기 사용량에 따라 폐연료봉 다발을 나눠 각자 집에 보관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방에 핵발전소가 위치해 있다고 해서 해당 지역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 몇 십 년간 핵발전소와 일상을 같이 해온 지역 주민들은 권력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왔다. 각종 사고 은폐와 부실시공 등 사업자와 규제기관에 정확한 해명을 요구했지만 그뿐이었다.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세간은 '지역이기주의'라는 이유로 손가락질하거나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시끄럽게 한다면서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이 방폐장 건설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어떨까. 수도권 주민들의 거센 반발은 불 보듯 뻔하다. 이 때도 지역이기주의라는 꼬리표를 붙일 것인지 아니면 시민들의 반대가 정당한 권리로 여겨져 '에너지 민주주의' 혹은 '에너지 정의'를 위한 초석이 될 것인지. 서울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건 사회적인 파급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도시의 안락함을 위해 왜 농촌이 파괴되고, 수도권으로 전기를 끌어오기 위해 고전압 송전탑을 지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위험도 지역민들이 감수해야 하고, 비난조차 그들이 짊어져야 하는가. 혹자는 수도권은 단순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방폐장 건설 선택지로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땅에는 이미 인구밀집 지역에 핵발전소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이번 기회에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전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인지해야할 필요가 있다. 

향후 폐연료봉 처리는 이산화탄소 감축 논의처럼 핵발전소 보유 국가들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지구촌 의제로 떠오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핵폐기물을 떠넘기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권력 지키기에만 급급한 약소국 독재 정부가 강대국 정부의 체제 유지와 경제 지원을 대가로 핵폐기물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도 밀실에서 비밀협정을 맺고 있을지 누가 아는가. 이른바 '원전 르네상스' 선전 목적으로, 아니면 반대의 경우도 있다. 미국 블루리본위원회는 '사용후핵연료 수거 프로그램'을 이용해 약소국에 원전 수출을 적극 권장하기도 한다. 

10만 년 후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현대 문명을 무엇으로 정의 내릴까. 현대를 상징하는 수많은 마천루들도 수 세기가 지나면 한 줌 모래로 변해 없어질지 모른다. 반면 사용후핵연료는 수 세기가 지나도 높은 붕괴열과 고(高)선량의 방사선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과시할 것이다. 핵폐기물 무덤은 현대 문명이 후대에게 남긴 유일한 무서운 유산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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