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쟁이와 빚진 죄인
빚쟁이와 빚진 죄인
  • 홍승희
  • 승인 2003.06.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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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성장기였던 지난 70년대에 “빚도 크게 지면 큰소리 칠 수 있다”는 말이 유행했었다. 현재도 거액 대출을 받은 기업보다는 소액 연체자인 개인들이, 고액채무자들보다는 소액채무자들이 더 빚독촉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게다가 70년대는 고속성장기였던 만큼 인플레 속도도 만만찮았고 시중금리에 비해 정책적으로 저금리정책을 썼던 까닭에 빚이 많으면 많을수록 큰 돈을 벌 기회도 커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현금보다 실물자산의 가치가 더 빠르게 커지는 상황에서 너나없이 빚 지기 위해 각종 특혜까지 동원하던 시기였다.

우리 사회가 너나없이 그같은 고속성장기의 체질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저성장시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어느 면에서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기업이나 개인은 물론이고 저성장시대에 대비해야 된다고 주문하던 정부 역시 여론의 향배에 신경쓰느라 실제로는 제대로 대비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IMF 구제금융을 불러들인 제1의 원인인 것은 이제 웬만한 사람들이면 익히 알고 있다.

어떻든 그 때 국가부도 위기 앞에 전국민이 긴장하긴 했지만 그게 개개인들에게도 같은 룰로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듯하다. 기업들은 그 때의 경험으로 분명히 깨달은 바가 있었을 것이지만 개인은 그런 구조적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응하기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증가일로에 있는 개인 신용불량자의 숫자가 그것을 반증한다.

정부가 신용불량자를 줄이겠다고 연초부터 내놓은 정책들은 실제로 신용불량자를 줄이는 효과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더 늘려놓는 惡手였음이 드러났다. 빚에 빚을 더하고 연체에 연체를 더하는 악순환 속에 개인들은 점차 제도금융권으로부터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은행에서 저축은행으로, 다시 대금업으로 가다가 그마저 여의치 못하면 더 이상 빠져들 수 없을 수렁인 超고리 사채로까지 몰려간다.

정책이 개개인의 신용을 눈 부라리고 깎아내려 사금융을 키워주는 꽤 우스운 모양새다. 이런 정책양상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과거에도 그렇게 해서 사금융이 일정 규모를 갖춰가면 제도금융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를 쓰고 그래서 금융시장에 한단계 계단을 늘려놓으면 또다시 정책적으로 그 계단에서 개인 금융소비자를 밀어 떨어뜨려 새로운 사금융망이 등장하게 만들고.

제도금융권에서 발길에 차이면서도 개인 신용불량자는 아직도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한달에 10만명 정도씩 계속 늘어 이미 3백만명을 넘어선 상태다.

이 숫자가 모두 고의적인 악성채무자는 아닐 것이다.

신용불량자들의 당초 카드 사용액이나 여신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부나 정책당국자들이 신용불량자 숫자는 열심히 내놓지만 전체 악성채무 규모는 발표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흡사 융통성 없는 법적용으로 교통사범 전과자를 양산하는 꼴이다.

신용불량자라는 신 용어를 사용하지만 전통적인 우리말로 치자면 간단히 빚 제때 못갚는 빚진 죄인이다. 그 죄인을 현재 정책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신용불량자 딱지가 붙은 사람 중에 고의적인 거액 악성채무자의 숫자와 단지 자산 관리능력 부족으로 상황이 딱하게 몰려버린 개인들 숫자를 비교해보고 그들의 빚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지금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일이 과연 장기적으로 금융산업을 위해 잘 하고 있는 일인지 답이 보이지 않을까.

정부가 사금융을 양성화시켜 제도권에 새로운 금융기관들이 양산되고 현실감없는 정책 속에 융통성이 사라진 그야말로 제도금융기관이 되어 또다시 사금융 시장을 형성하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뜻은 있는지 궁금하다. 근본적 대책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정책은 늘 물 위의 기름처럼 떠돌기만 할 것이다.

계단을 만드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계단이 바닥에서부터 올라가지 않고 무슨 마법사들의 계단처럼 허공에 떠있다면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시중의 살인적 고금리와 공금리 사이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자금흐름은 왜곡되고 무수한 신용불량자들이 양산되며 숱한 국민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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