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주의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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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홍승희기자] 요즘 우리사회에는 유독 ‘원칙’을 강조하는 목청이 크다. 대화와 협상, 그리고 타협이 필요한 남북관계에서는 물론 정당과 정당 사이, 정당 내부에서조차 ‘원칙’이 지나치게 강조되며 서로서로 겉돌기만 거듭한다.

물론 사회공동체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 원칙은 세워지고 또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그 원칙이 사람을 위하고 그 사람들의 공동체를 안전하게, 안정적으로 유지시켜가기 위한 대원칙 없이 특정 집단의 욕망에 의해 세워진 작은 원칙에 사로잡히면 그건 삶의 현실을 외면하고 원칙을 위한 원칙이 강조되는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만다.

지금 우리 사회에 차고 넘치는 원칙의 노랫소리가 과연 어느 쪽에 속할까.

내년도 세계 경제는 매우 불안할 것으로 전망되고 그 한가운데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설 곳도 없는 한국 경제가 있다.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향해 온몸을 내던지는 모험정신이 결여된 때문이며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물질문명의 안락함에 흠뻑 젖어든 까닭이다.

개발독재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어차피 가진 게 별로 없다보니 모든 것을 걸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모험정신이 곧 기업가정신과 동일시됐었다. 지금의 대기업 대부분은 그런 창업주들의 모험심을 발판 삼아 오늘에 이르렀으나 이미 기업은 덩치가 커졌고 얼기설기 엮인 관계들은 하나의 기업이 무너질 때 엄청난 규모의 부도 도미노현상이 벌어질 여건이 마련됐다. 게다가 맨손으로 스스로의 성을 구축해본 적 없이 갖춰진 상황에서의 안정적 경영을 수업 받은 2세, 3세 오너들은 차원상승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재의 세계 경제 상황에 나아가 싸우기에는 경험도 부족하고 두려움도 클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목청 드높이는 ‘원칙’에 충실한 경영인 첫 세대일 지도 모르겠다. 무모한 도전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귀족적 경영수업을 받은 그들이 현장 노동자들과 함께 땀방울 흘려가며 거친 음식을 함께 나누던 선대의 투지 따위를 공감할 수는 없는 테고 단지 정해진 길을 안전하게 가는 데 충실하고자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세계의 경제 현장에는 엄청난 파고가 밀어닥치고 있다. 거대기업이 다른 거대기업을 인수`합병하는 메가딜 열풍을 보면 시장은 갈수록 전문업종의 초거대기업들에 의해 장악될 기세다. 이런 시장에서 어정쩡한 규모의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단순한 자산 규모 키우기만 해온 국내 기업들의 다업종 투자전략은 미래 시장에 대한 자신감 결여가 초래한 안전장치였을 터다. 그러나 결과는 단 하나의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먹혀버리게 만들 위험을 키운 셈이다.

먹히거나 망하거나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당할 위험 앞에서도 여전히 국내 재벌들은 머뭇거리고 있다. 선두기업이었던 삼성전자가 스스로의 시장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남이 만들어놓은 시장에서만 활개 치다 후발주자들에게 뒤꿈치를 잡힌 상태가 되고 선두그룹 따라잡기에만 급급했던 현대자동차는 선두대열 진입 어간에서 오히려 뒤로 밀리는 형국이다.

그 덕분에 두 기업에 국내 GDP를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던 한국경제는 초비상 사태를 맞았다. 정부도 기업도 자주적 시장 열기에 무관심했던 결과다. 2인자의 자리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그 자리에도 오를 수 없고 남의 시장만 기웃거리는 장사치는 결코 대상, 즉 큰 상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사대주의, 식민주의의 잔재는 이토록 우리 사회의 의식 저변에 짙게 배어있어서 오늘날 우리의 성장에 한계를 지워주고 있다.

우리 역사에는 환웅이 ‘신시’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개천을 하고 신시를 열었다는 얘기는 천제를 지내며 널리 사람들을 끌어 모음으로써 자연스럽게 각 지역 특산물들의 교류가 이루어졌을 테고 인류사상 최초의 ‘시장’이 형성되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한 기록이다. 환웅이 신시를 열고, 우리와 같은 동이인이었던 상나라가 망한 후 장사길로 나서서 오늘날 상인이라는 말을 남겨놓았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교육했더라면 우리가 근세 몇 백 년 간 찌든 의존적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람의 자발성을 믿으며 기득권을 지키고 지켜주기 위한 이데올로기 놀음에 국력을 낭비하지도 않고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의존성, 배타성을 버리고 신시개천의 정신을 되살려낸다면 막막해 보이기만 하는 우리의 앞길도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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