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만만한(?) 은행원의 호주머니
[기자수첩] 만만한(?) 은행원의 호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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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이은선기자] 지난 20일 한국은행 금융협의회에서의 한 장면. 포토라인에 선 이광구 우리은행장은 함영주 KEB하나은행장에게 "하나은행이 앞서간다. 연봉반납도 먼저했다"며 말을 꺼냈다. 옆에 있던 윤종규 KB국민은행장도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거냐"고 물었고, 멋쩍게 웃던 함 행장은 "직급별로 다르다"며 한동안 설명을 이어갔다. 어수선한 자리에서 목소리를 낮춘 탓에 세세한 내용까지 들을 수 없었지만, 은행장들이 한 자리에 모인 공식 석상에서도 최근의 연봉 반납 행렬은 업계 화두임은 분명했다.

KEB하나은행은 지난 16일 옛 외환은행 직원들의 올해 급여 인상분 전액을 반납한다고 발표했다. 전 하나은행 직원들은 빠졌다. 국책은행들도 합류했다. 산업은행이 팀장급 이상 직원들의 임금을 내놓기로 했고, 수출입은행 직원들도 11~12월 수당을 받지 않기로 했다. KEB하나은행의 경우 외환은행 출신 직원들의 평균 급여가 하나은행보다 700만원 가량 높아 화합 차원에서 급여 반납이 다소 원활하게 이뤄진 것으로 해석된다. 대기업 부실 책임론과 함께 역할 축소까지 거론되고 있는 두 은행으로서는 위기 타개책의 색채가 짙다.

지난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도 은행권은 전 직원들의 임금을 반납한 전례가 있다. 위기의 원흉으로 꼽히는 월스트리트 일부 금융사가 정부 지원을 받고도 '성과급 파티'를 벌이면서 '금융권 고임금' 논란이 증폭된 시기다. 우리 금융사들의 반토막 난 실적과 외환 유출로 받았던 정부의 외화차입 보증도 임금 반납의 구실이 됐다. 당시만 해도 은행권에는 급감한 실적에 대한 책임감과 함께 일시적인 충격을 감내하고 앞으로 실적을 회복하면 임금이 다시 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저성장 장기화에 향후에도 금융권 수익성이 호황 때 만큼 확대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내부적으로 만연하다. 이런 와중에 당국은 일시적인 임금 축소가 아니라 금융사의 성과가 임금에 반영되도록 구조 자체를 개편해야 한다고 나섰다. 은행 직원들은 이를 사실상 '임금 하향' 정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성과주의 임금 개편 시범사례로 지목된 기업은행 노조는 '총파업'으로 대응하겠다며 맞서고 있다. 금융노조도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성과연봉제 도입 획책을 중단하라"며 노사정합의 파기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물론 은행의 호봉제 임금 구조가 낳는 이른바 '승진포기자', 승진 예정자 몰아주기 인사평가 관행의 비효율성 등은 시정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는 이미 형성됐다. 금융 거래의 무인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은행 인력이 갖는 희소성이나 필요성이 장기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점도 피할 수 없는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가시화되지 않은 '위기론'을 강조하며 충분한 합의 없이 이뤄지는 임금개편은 사상 초유의 저금리에도 당장 양호한 수익성을 유지하고 있는 은행원들에게 쉽사리 납득될 리 없다. 은행업에 대한 실질적 이해가 부족한 일부 당국자들의 단편적 발언으로 '은행원은 억대 연봉을 받으니 연장 근무를 해도 되고, 임금을 좀 낮춰도 된다'는 식의 여론이 조성되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

이달 5일 금융권의 바람직한 성과주의 방안을 도출하자며 개최된 토론회에서 김민석 금융노조 정책국장은 "부총리와 금융위원장이 은행권의 임금 체계를 개편하겠다고 이미 다 발표해놓고 노조 대표를 불러서 그 득실을 논하자고 한다"고 꼬집은 바 있다. 당장 내 호주머니 사정이 변할 수도 있는 임금 개편이 진행된다면 대상이 되는 주체들과의 충분한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먼저 공동의 가치에서 비롯된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고 상호 동참이 이뤄져야 한다.

"정작 개편이 시급한 공기업 임금체계는 손 놓고, 만만한게 은행이냐."는 은행원의 볼멘소리가 소수의 의견이 아님을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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