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은행권의 정권코드 맞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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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정초원기자] "은행에 진짜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몸은 좀 힘들어도 열심히 하겠죠. 그런데 요즘에는 윗선(경영진)에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직원들을 압박하는지 의문이 드는 현안이 너무 많아요."(A시중은행 직원)

최근 금융권에 울려퍼지는 은행 직원들의 앓는소리가 심상치 않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업 제일주의' 기조로 인해 받는 실적 스트레스가 일상적이었다면, 최근에는 '차라리 은행 영업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억울하지는 않겠다'는 하소연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정부 관계자의 말한마디에 갈대처럼 바뀌는 경영 행보 탓이다.

그간 '관치금융'이라는 지적을 수없이 받았던 감독당국은 오히려 "은행에 자율성을 주겠다"며 금융개혁을 선언했지만, 은행들은 당국의 선언이 무색할 정도로 청와대 코드 맞추기에 분주한 모양새다.

우선 지난달 출시된 '청년희망펀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펀드 출시와 함께 몇몇 시중은행들이 직원들에게 이 펀드 가입을 강제했다는 논란이 제기된 것. 특히 일부 지점에선 계약직 직원들에게까지 펀드 가입을 강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누가 누구를 돕냐'는 뒷말이 나돌았다.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는 펀드의 취지는 좋았지만, 일자리 시장에서의 상대적 을(乙)들이 또 다른 약자인 미취업 청년들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도울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결국 이 문제로 가장 크게 홍역을 치른 KEB하나은행이 뒤늦게 "펀드 가입에 강제성은 없다"고 해명하면서 논란은 다소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단기간에 올리기 위해 직원들을 압박했다는 의혹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KEB하나은행이 직접적으로 가입 독려 메일을 보낸 데다 펀드를 가장 먼저 출시한 탓에 논란의 중심에 섰을 뿐, KB국민·신한은행 등 다른 시중은행들도 펀드 가입을 암묵적으로 의무화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게 영업점 직원들의 설명이다.

정권 코드에 맞춘 '상품 실적 쌓기'는 청년희망펀드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한 시중은행 노조 관계자는 "상품을 개발하거나 주력 상품을 마케팅하는 과정에서도 정부 코드를 맞추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고 귀띔했다. 물론 은행산업의 특성상 정부 정책에 발맞춰 소비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상품을 선보인다면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여지도 있다. 문제는 일부 은행들이 정권 코드에 맞춘 상품 실적을 단기간에 부풀리기 위해 기존 상품 실적과 합치는 '꼼수'를 부리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내 은행들의 영업시간을 지적한 이른바 '4시 발언'도 은행권에 파장을 일으키기는 마찬가지다. 국내 은행이 다른나라에 비해 문을 일찍 닫는다는 게 최 부총리의 발언 내용인데, 이같은 발언이 알려지자마자 주요 시중은행들은 변형 시간근로제의 확대를 검토하고 나섰다.

변형 시간근로제를 확대하는 것이 실제 소비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안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은행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경영진이 최 부총리의 말 한마디에 즉각 반응해 이미 정착된 시스템을 다시 검토하게 만드는 모양새는 결코 좋아 보이지는 않다.

최 부총리는 은행 영업시간을 지적한 페루 출장 당시 주요 금융사 CEO들과 식사하며 건배사로 "우간다(우리나라 금융이 간다)를 이기자"라고 외쳤다고 한다. 최근 세계경제포럼(WEF) 금융산업 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이 우간다(81위)보다 낮은 87위를 기록한 것을 염두에 둔 건배사로 풀이된다.

하지만 금융산업 선진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보다도 '관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정부는 시중은행의 경영에 자율성을 주고, 은행은 내부통제 역량을 갖춰 경쟁력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금융개혁이 아닐까. 무엇보다 은행권 스스로가 관치의 타성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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