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운명과 승부 정치
그리스의 운명과 승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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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스 홍승희기자] 한국에서는 희귀한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와 그 과정에서 쏟아낸 대통령의 발언이 정국을 들끓게 하는 데 반해 국제통화기금(IMF)에 채무상환을 못해 유로존 탈퇴를 향해 한발 더 다가선 그리스에서는 현 정부의 ‘정치적 결단’이 공표되면서 그동안 그리스를 끌어안고 가기에 심혈을 기울여온 유럽이 뒤통수를 맞았다고 노발대발이다.

그리스의 악화되고 있는 상황은 이미 예견된 것이어서인지 ‘기술적 디폴트’라는 상당히 완화된 표현이 사용되는 IMF에 대한 채무불이행에도 실상 자본시장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는 모습이다. 물론 오는 20일 상환일이 도래하는 유럽중앙은행(ECB)에 차입금 상환을 못할 경우는 실질적 디폴트이기 때문에 시장의 반응도 달라질 수 있겠지만 시장 반응은 어떻게든 유럽이 그리스를 끌어안고 가리라는 기대감이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EU가 유로존 재무장관회의(유로그룹)에 제출할 공동제안까지 합의되고 있던 상황에서 그리스 정부가 갑자기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하는 황당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유럽연합은 발끈해서 뒤늦게 사실 확인을 한 협상팀이 협상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단까지 벌어졌다니 이후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장래가 꽤 불투명해 보인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그리스가 국민투표를 철회하지 않으면 새 제안을 협상하지 않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내놓은 상태다. 유로그룹 내에서 독일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그리스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그런데 그리스 정부가 왜 유로그룹의 최종 제안이 나오기도 전에 이런 초강수를 두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단지 추측만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국민투표 철회를 EU를 향한 협상카드로 쓰려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지만 이미 그리스 의회가 국민투표 실시를 결의한 상황에서 이를 합법적으로 철회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그리스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어서 그저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현재 그리스 정부는 유로그룹과 재협상에 나설 새 제안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정부가 내놓을 새 제안의 구체적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이 제안이 채권단의 제안에 매우 근접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채권단의 당초 제안이 연금 삭감과 부가세율 인상, 민영화 촉진 등인데 그런 요구에 어떤 대안을 제시할 것인지 불확실하다.

어쩌면 치프라스의 그리스 정부는 유로존이 아니라 자국민들을 향한 압박 수단으로 국민투표를 결행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디폴트를 피하기 어려운 현실과 유로존 탈퇴를 향해가는 그리스의 상황에 국민들이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든 디폴트 상황을 초래하든 알아서 선택하라는, 정권을 맡은 정부로서의 책임방기는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유로존의 제안을 정부 일방으로 수용했을 때의 국내 정치적 부담도 만만찮을 것이므로.

그리스가 정말 실질적 디폴트 상황이 된다면 은행과 기업들의 연쇄 파산 도미노에 휩쓸리고 물가급등과 실업급증 등의 혼란을 피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우선 은행들의 파산이 줄줄이 이어진다면 그나마 그리스를 먹여 살리는 핵심 산업인 관광산업 역시 심대한 타격을 면치 못할 것이니 국가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위기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정부는 국가의 위기를 앞에 두고 정치적 승부수를 띄운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게 단지 남의 나라 일이기만 하면 좋겠다.

물론 한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던진 승부수는 그 정도 수위까지 다다르지는 않았다. 단지 정치를 권력의 강화도구 정도로 여기고 여당마저 사적 배신감에 쪼개어 추스르려는 대통령의 입에서 국가위기가 운위된 것이 민망할 뿐.

그리스의 위험이 코앞에 닥친 현실이라면 우리의 위험은 어쩌면 대통령이 민의의 전당에 선전포고하고 나아가 국민들에게 의원심판까지 요구한 초헌법적 본심을 드러내도 여전히 대통령을 노엽게 한 국민의 대표 국회의원이 그 앞에 석고 대죄해야 한다고 믿는 여당 정치인들이 내뿜는 반시대적 독성에 서서히 잠식되어가고 있는 중독증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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