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라는 이름의 종교
과학이라는 이름의 종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들의 일상 언어 중에는 ‘과학적’이라는 수식을 붙여서 회의나 의심을 잠재우는 수사법이 존재한다. 언제부터 시작된 습관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아무래도 미국으로부터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서구 자연과학에 대한 경이감을 갖게 된 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어떻든 이 ‘과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그 때부터는 의심의 여지없는, 의심해서는 안 되는 무조건적 진리가 되면서 전혀 과학적이지 못한 종교적 행위로 전환된다. ‘과학적’이라는 데 의구심을 제기했다가는 졸지에 무식한 사람이 돼 버리는 매도 분위기를 웬만한 배짱 아니면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실상 과학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 의심을 풀든 확인하든 하기 위해 탐구하는 과정일 터인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과학이 절대불변의 진리인양 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이 자연과학이라면 일단 그래도 수식으로 혹은 증명으로 어떻게든 가시적 해명이 가능한 영역이라지만 인문학에서조차 “이건 과학입니다”라고 한마디 해버리면 저절로 대중은 함구하게 된다.

문명사의 흐름 위에서 학문적 성과를 쌓아가는 서구 사회의 인문학자들과 달리 우리 사회의 인문학 분위기는 다분히 반(反) 과학적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전혀 이질적인 분야로 여기는 이들 입에서 ‘과학적’이라고 표현되는 것들의 과학성을 어떻게 봐야 할지 황당할 지경이다.

지금도 종종 마주치는 이런 ‘과학적’ 인문주의자들과 ‘사람’의 설 자리를 염두에 두지 않는 과학주의자들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냥 과학이라는 신흥종교의 교도들로만 보일 뿐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가 첨단과학기술을 대할 때도 흔히 그런 맹신적 태도를 보인다. 첨단기술의 절대적 우위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좋지만 그에 따른 결함, 부작용마저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모든 첨단 의약품은 아무리 부작용이 없다고 강조하는 것이라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부작용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더욱이 그 부작용을 되도록 감추려 하는 다국적 제약사들의 실험자료를 100% 다 봤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아직 보지 못한 부분은 제쳐두고 컴퓨터 사용자들이 겪은 그간의 변화만 한번 봐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처음 컴퓨터가 등장했을 때 매스컴들은 무제한 용량을 담을 수 있는 영구적 저장장치라고 요란하게 묘사했다. 저장장치를 마치 환타지 소설에 나오는 마법배낭처럼 묘사한 게 불과 10여년 전이다.

그런데 그동안 컴퓨터 저장장치는 몇 번 업그레이드를 거쳤고 이동저장장치는 또 얼마나 변했던가. 10년 전 쯤에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가 3.5인치로 바뀌었고 지금은 그나마 사라져가고 그 자리를 손가락 하나 크기만한 USB가 대신해가고 있다. 그리고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담긴 자료들은 이제 복구할 컴퓨터마저 찾기 어렵다.  자료가 손상없이 멀쩡할지도 물론 믿을 수 없다. 그럼 10여년 전의 그 현란한 수사들은 다 뭐란 말인가.

지금의 컴퓨터 인쇄기술 역시 그런 우려를 받고 있단다. 컴퓨터 인쇄로 간행돼 나오는 요즘 책들은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글자들이 전부 날라가 버릴 것이라는 얘기다. 일제시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육당 최남선 등 민족사를 지키려던 이들이 사라진 목판이나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활자본 대신 택했던 석판본 도서들이 지금 꼭 그런 운명에 처해 있다.  한지를 대체해 보급되던 당시의 종이는 지질도 나빠 지금 바스라지기 직전 상태인데다 활자도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흐려지고 있다. 근래의 우리가 100년을 내다볼 수 없는 근시안이 된 것이 이런 일들과 무관한 것은 아닐 터이다.

오늘 우리가 만드는 많은 자료들 또한 그런 운명을 겪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완전하거나 영원할 수는 없음을 다시 기억할 일이다. 홍승희 <편집국장>

이 시간 주요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