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사나이 영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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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고 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
▲고 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     © 서울파이낸스

“시련의 사나이, 불굴의 의지를 지닌 경영인” 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이 지난 20일 오후 2시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끝내 세상과 등졌다.

 정인영 한라건설 회장은 우리나라 중공업 역사의 선구자이며 개척자이자 산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가 경공업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60년대초 한국의 중공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굳센 의지로 그 당시 어느 누구도 뛰어들지 못했던 중공업 분야에 과감히 첫 발을 내딛은 개척자였다.

 정회장은 1962년 10월 “중공업 개발없이는 경제발전이란 있을수 없다”라는  독자적으로 현대양행을 설립해 중공업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자동차부품, 조선, 플랜트, 중장비, 시멘트, 펄프제지, 해운, 정보통신, 자원개발, 건설등 중후장대한 분야에 온 정열을 쏟아부어 ‘대한민국 중공업 입국’과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정부는 1962년 2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년)을 발표했는데 한라의 성장과 함께 한국의 공업구조도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빠르게 변하게 됐다.

 유창한 영어실력을 구사하는 정 회장은 국내에서  최초로 건설 중장비를 생산해 국내는 물론 해외수출에 나섰고  사우디아라비아의 SPCC 지잔 시멘트 공장을 턴키베이스로 수주해 한국 최초의 해외 플랜트 턴키건설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정회장은 사업초기부터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해외시장을 적극 공략해 ‘중공업과 해외시장 프론티어 기업인’으로 불리워 졌다.
 
시련...시련...시련

그의 화려한 경영 이력과는 달리 정회장의 삶은 영욕과 굴곡의 세월로 점철돼 왔다.  1976년 당시 단일규모로는 세계 최대 종합기계공장인 현대양행 창원공장 건설에 착수했으나 1980년 준공을 앞두고 정부의 발전설비 통합조치에 의해 타인에게 넘겨줘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신정부에서 현대양행 군포공장과 중장비공장마저 경영권을 포기하면서 무일푼으로 전락한 정회장은 그러나 변변치 못한 나머지 계열사를 추스려 재기에 성공했고 이후 한라그룹은 계속 성장했다. 

시련은 계속 됐다. 1989년 7월 정회장은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진 것. 정회장은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신세가 됐지만  “병을 이기는 것도 사업이다”라며 병마를 극복했고 1996년 한라그룹을 재계랭킹 12위까지 끌어올렸다. 10대 그룹 진입을 목전에 둔 한라그룹은 그러나 1997년 12월 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부도를 맞았다. 이후 한라그룹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한라건설(주)을 중심으로 또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정회장의 인생역정이 이같이 수많은 시련과 극복의 삶으로 반복되자 많은 사람들은 그를 ‘휠체어의 부도옹’  ‘오뚝이 기업인’ ‘실패를 모르는 불사조’ 라고 불렀다. 정회장은 지난 1991년 우리나라 중공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업인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
 
검소한 삶
 
고 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의 사생활은 검소했다. 양복을 사면 보통 10년씩 입는다. 80년대에는 옛 양복에 옷감을 덧대 바지를 늘려 입은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정회장을 처음보는 외국인들은 정회장을 운전기사로 착각하고, 옷 잘 입은 운전기사에게 악수를 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넥타이는 붉은색 줄이 사선으로 가있는 한 가지 종류만 애용했다.
그의 검소한 삶에 대한 대표적 일화는 지난 1981년 국보위 시절이었다. 당시 국보위에서는 고인의 집을 압수수색을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수사관들이 고인이 살고 있던 서울 남현동의 허름한 슬라브 집을 덮쳤으나 아무 장식 없고 사무실 같은 검소한 방을 둘러보고서는 “무슨 재벌 사장 집이 이래”하며 투덜거리며 돌아간 적도 있었다. 직원들이 새집하나 지으시라고 건의하면 “공장 짓기도 바쁜데 무슨 집을 짓냐”며 면박을 주었다.
이러한 검소한 정신으로 고인은 1980년 타의에 의해 현대양행 경영권을 내놓았지만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해외 출장 때는 고추장 그릇을 가지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종종 라면과 고추장으로 식사를 때우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의 습관으로 최근까지도 식사는 주료 면류를  많이 애용했다. 일 잘하는 임직원들에게 막국수나 냉면 등을 사는 것을 즐거워했다. 
한편 정 회장은 민간외교사절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이탈리아 친선협회회장, 파푸아 뉴기니 명예영사등으로 있으면서 이들 국가들과 직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는데 앞장섰다. 정 회장은 1979년 2월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83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이탈리아 Commendatore 공로훈장을 받은데 이어 1986년 4월에는 이탈리아 국민훈장을 받았다.

1991년 정 회장은 정부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였으며 1995년 한국능률협회가 주관하는 한국경영자상을 받은데 이어 1996년에는 한국경영학회로부터 한국경영자 대상을 수상했고 같은해 중앙대학교로부터 참경영인상을 수상했다. 1997년에는 서울언론인클럽,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정 회장은 중앙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 박사, 미국 Long Island University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 전남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영국 웨일즈 대학에서 명예 펠로우를  받았다.  
 
후계구도
 
1997년 1월 3일 정인영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한라건설과 만도기계등을 잘 경영하여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차남인 정몽원 부회장을 그룹회장으로 임명해 후계구도를 마무리 지었다. 정몽원 회장은 1997년 이후 현재까지 한라건설(주)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따라서 한라건설은 정몽원회장의 현 체제를 유지하고 경영권의 변화도 없게 된다. 정몽원 한라건설회장은 서울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에서 MBA를 전공하고 돌아온 정회장은 성격이 소탈하고 친화력이 있다는 평이다. 

한라건설은 국내외에서 토목, 주택 및 개발사업, 플랜트 사업 등을 전개해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경부고속철도, 서해안고속도로, 인천국제공항 활주로등 각종 도로와 철도, 공항 항만등 토목공사와 사회기반시설 건설사업, 준설사업 등에 참여하고 있다. ‘한라비발디’라는 브랜드로 아파트 시장에 참여해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한라건설은 2005년 매출 8491억원, 당기순이익 432억원을 기록했으며 올해는 매출 약 9000억원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라건설은 자동차 부품업체인 (주)만도 인수를 추진하는 등 사업다각화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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