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참을 수 없는, 97억 짜리 자기 과신의 위험성
[한반도] 참을 수 없는, 97억 짜리 자기 과신의 위험성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전, 노래방에 가게 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으니, "하고 싶은 노래 말고, 할 줄 아는 노래를 불러"라는 것이었는데,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를 보면서 딱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은 왜 일까. 혹자는 "자꾸 불러야, 할 줄 아는 노래가 되는 게 아니냐" 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시간당 1만원 내외의 돈을 지불하는 노래방에서나 가능한 얘기이지 순수제작비를 97억 원이나 쏟아 부은 영화를 두고 할 소리는 아닌 것이다.


<한반도>를 비평하기에 앞서

강우석 감독은 신부감을 찾아 상경한 농촌총각의 이야기를 그린 <달콤한 신부들>로 1988년 데뷔한 이래 현실비판을 코미디와 접목시키면서 대중과 호흡해왔고 이제는 명실상부한 한국영화를 움직이는 힘의 한 축으로 자리한 인물이다. 강우석 영화의 특징은 집단적 기억과의 절묘한 접합을 통한 영상화로 흥행코드를 읽어낸다는 점이며, 또한 그의 영화는 감당할 만큼의 눈높이를 유지하는 영민한 방법으로 언제나 대중의 호흡을 읽어내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반면에, 그의 영화는 이벤트와 해프닝의 나열로 이루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즉 시나리오작가 입장에서야 드라마구조를 잘 엮어내어 시작과 끝을 매끈하게 마무리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영상화된 실체는 이벤트와 해프닝의 연속이 모인 에피소드드라마의 모습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달콤한 신부들>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대변되는 습작시대와 <미스터 맘마>에서 <투 캅스>시리즈 <마누라 죽이기>까지를 관통하는 성장시대를 거치는 동안 어김없이 드러나는 강우석 영화의 특징이다. 이런 초기 습작시대와 성장시대를 거친 후 “다른 것은 다 주어도 이것만은 절대 양보 못 한다”라고 했던 <공공의 적>이 탄생하면서 그의 영화는 진일보 한다. 다시 말해 <공공의 적>과 <실미도>는 강우석의 영화시대의 정점을 상징하는 작품임과 동시에 해프닝의 영화에서 탈피하여 탄탄한 드라마를 바탕으로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풀어가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의 장기가 진지한 사회고발드라마에서 나타나기보다는 사회풍자코미디에서 빛을 발하곤 했다는 점에서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과녁이동을 하고 있는 그의 행보는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비록 흥행과는 무관했지만, 초기작 시절부터 변함없이 견지해온 “영화는 오락이다. 따라서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라는 그의 신념이 표출된 영화들은 강우석의 오늘을 만들어내었고, 상업영화의 장인으로, 영화산업 파워의 핵심으로 자리하게 한 원동력이었음이다. 분명 그의 코미디물은 신선했고, 재미있었으며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사회문제를 놓치지 않으려 고민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가 대중보다 평단을 의식한 작품들(<공공의 적> <실미도>)에서는 그의 장기인 해학과 풍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흥행과 무관하게 강우석 영화를 오래 동안 지켜본 사람으로서 실망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강우석의 신작 <한반도>가 종잡을 수 없는 총체적 난맥상을 드러내고 풍자와 해학대신에 어설픈 민족주의를 차용하면서, 사회고발이 아닌 정치적 신념을 강조했으며, 완벽한 상상도 현실도 아닌 어정쩡한 시재를 들이대고는 일관성 없이 시류에 맞춰 한탕주의를 노린 블록버스터로 전락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이다.  


<한반도>는 남북한 정상이 참석한 경의선 철도 개통식장에서 경의선 철도 소유권에 대한 일본 측 항의통보와 재야사학자 최민재 박사와 국정원간부 이상현의 설전으로 시작되면서 과거사 청산에 대한 두 축의 첨예한 대립을 예감케 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만 놓고 보자면 일본과의 전면전을 통한 과거청산과 통쾌한 복수극 혹은 민족자존심을 세워줄 만한 무언가를 준비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엉뚱하게도 지배계급(통치주체)의 이데올로기를 계몽하고 답습하며 확장 설파하는데 주력함과 동시에 과거사에 대한 전면부인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쥔 진정한 주인공, 대한제국 국새(國璽)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국새 존재의 단서가 적힌 문헌을 보관하는 자인 김유식의 현재 모습이다. 그는 고종의 칙명을 받들어 국새를 숨긴 환관의 후손으로 현재는 무위도식 하며 조상의 은덕을 입어 금괴나 찾으려는 허황된 꿈에 사로잡힌 사람인데, 그가 처음 등장하는 여관방 신부터가 영화의 정치색이 피어오르는 지점이다. 도굴전과 7범의 김유식의 오늘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제국의 앞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왕명을 수행했던 자의 후손이 오늘에 이르러 더욱 참담한 현실에 놓여 져야 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친일파의 후손이 지배계급을 점하는 반면 독립운동가의 자손은 단칸방에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과 중첩되면서 영화에서 과거청산을 주장하는 대통령에게 명분과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관객의 정서적 참여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김유식과 한 달 동안 문화강좌 5개를 날려먹은 사학자 최민재가 만나 그들의 든든한 지원자 대통령의 힘을 얻어 국새 찾기에 나선다.



<한반도> 무엇이 문제인가!

과거청산과 극일이라는 첨예하지만 흥미로운 소재를 변용해 만든 <한반도>는 과거의 재구성과 미래의 허구적 상상 사이를 오가는 동안 반일정서를 연결고리로 사용하면서, 막연한 상상에 머물기보다는 현실화되길 바라는 관객의 집단적 소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집단적 소망의 차용은 강우석 영화가 오락성에서 탈피하여 역사와 당대한국사회를 진지하게 바라보려는 욕망에서 발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통치계급(정권주체)의 헤게모니를 합법화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는 점과, 반일감정이라는 국민 대중정서에 대한 과도한 믿음과 이를 손쉽게 이용하려는 데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일이다. 이제부터 통치계급의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한반도>를 살펴보면서 이 영화가 가진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데올로기 비평이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조작 혹은 통치로 간주하는 약간의 대중문화 모델들과의 관련 속에서 독해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사회-정치적 논쟁들과 투쟁 내에서의 상황별로 독해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에 있어서, 예컨대 우익 영화들은 보수적인 헤게모니의 실제적인 협박들에 대한 대답으로써, 실제적인 사회적 투쟁들과 모순들에 대한 증거로써 독해되어질 수 있고, 자유주의 영화들은 보수적 헤게모니에 대한 논쟁들로 독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반도>는 보수수구 세력의 책동을 경계하려는 진보개혁주의자들의 공포가 담겨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관람자에 따라서, 진보에 대한 보수의 공포로 읽힐 수 도 있는 텍스트를 굳이 보수에 대한 진보의 공포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표면적 지배이데올로기가 급진적 진보개혁이라는 것에 기인하는데, 영화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전능한 지배계급의 수중에 있는 통치의 강제력으로 개념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반대세력이 벌이는 저항에 대한 응수로, 지배적 그룹, 지배적 노선이 가지는 권력들의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이라는 기호와 컨텍스트적으로 분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대로 영화로 표출될 때 오는 관객과의 괴리감은 글 뒤에서 다시 설명하게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읽어보자.


문제_ 하나. 지배정권의 헤게모니 합법화

을미사변에서부터 을사늑약까지의 격동의 근대사에 놓인 대한제국의 종말과정을 오로지 과거청산이라는 단 하나의 명제를 위한 서브플롯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비록 과거역사의 재구성을 통한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고는 하지만) 당대 한국사회의 지배주체와 극단적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데 주력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일본의 과오를 부인하거나 과거청산을 반대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지만, 문제는 현실에서 보여 지듯이, 방법과 시기, 분류와 선택과정의 끊임없는 충돌로 인해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원론적 합의만 도출해낸 지경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당대 한국사회 지도층을 점유한 많은 이들이 친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쉽사리 풀어내지 못하는 난제이기에,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로 전락해버린 실정이지 않은가. 그러하기에 ‘영화에서 만이라도 확실한 대안을 내놓거나, 아니면 시원한 뒤집기 한판을 통해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불만을 토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일촉즉발의 긴장감으로 대치하던 중반이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버리고는 고도의 정치적 득실까지 계산하여 과거청산의 대상을 보수수구세력까지 확장시켜 버린 것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가진 문제는 동북아 정세와 세계정세에 첨예한 사안인 일본과의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현 정권의 입장을 지나치게 옹호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한반도>는 지배정권의 헤게모니를 합법화 하면서 특수계급의 이익을 보편적 이익이라 위장하고는 정권이익에 봉사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임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논점은 영화 속 통치계급의 이데올로기가 그들 이익에 봉사토록 관객에게 강요하는가. 라는 것인데, 즉 영화 속에 그려진 대통령의 과거사청산 노력이 현 정권의 개혁노선에 어떻게 접합하여 당위성을 심어주는가라는 점이다. 이는 영화 속 대통령과 국무총리, 대통령의 사람들과 반대편에 선 사람들, 최민재와 이상현으로 양분해 놓고는 철저하게 이분법적 대극상황을 설정함으로써 보수수구세력과 진보개혁세력간의 갈등과 분열양상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으로 쉽게 설명된다. 또한 일본의 해상자위대 출몰과 관련한 대책회의 장면에서의 갑론을박에서 볼 수 있듯이, 구한말 고종을 압박하던 을사오적과 현재 국무위원의 성향을 집중적으로 병치시키며 풀어가는 연출방식에서 그 의도는 극대화 된다. 당연히 영화에 담긴 심층적 메시지는 현재 한국사회의 보혁 갈등과 과거사청산 문제와도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이것이 허구와 과거의 재구성으로 만든 영화에서 오로지 일본에 대한 자성과 역사재인식에 초점을 맞췄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요컨대 <한반도>는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세계에 고발하고 과거청산이라는 거대 담론의 관객동의를 통해 진보와 보수 세력의 대한 손쉬운 판결문까지 얻어내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에 근거한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결과물이 가능했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목표지상주의를 꼽을 수 있다.



문제_ 둘. 극단적 목표지상주의

강우석 감독이 <공공의 적 2>의 개봉당시 “다음에는 우리사회의 더 거대한 공공의 적을 대상으로 하고 싶다”라고 표명했던 것을 감안할 때 이 영화는 <공공의 적 3>편으로 볼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강우석 감독은 <한반도>와 관련해 “영화를 통해 외세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지금도 여전히 100년 전 역사처럼 외세가 우리를 가지고 놀면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황제를 독살하는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고 있는 느낌이다.”라고 제작 동기를 밝히고 있지만, 그보다 앞서 외세의 정확한 규정과 더불어 해결방법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을 택하는 것이 맞는 순서였다. 일본침략사의 역사전복과 현안의 해결방식 과정이라는 것이 내부의 적을 찾아내어 척결함으로써(을사늑약 때와 마찬가지로 내부의 적이 과거청산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근시안적 현실인식에서 오는) 가능해진다는 식의 단선적 드라마구조는, 여전히 더 큰 외세를 외면한 채 손쉬운 대상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패배주의의 단면마저 보여주는 것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현재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헤게모니를 쥔 자가 과연 일본인가 하는 의문은 영화 초반, 단 한번 등장하는 미국외무성 대변인의 논평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사회의 보혁갈등이 떠올려 질 만큼 무리한 상황을 설정했다는 것은 강우석 영화가 <공공의 적>이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드러나는 극단적인 목표지상주의와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공공의 적>에서 부패형사 강철중의 악질행위는 상대인 조규환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암묵적으로 용서되고 합리화 된다. 이때 영화의 역할은 강철중 개인의 감정을 공적의무로의 의식전환을 통해 그의 행위가 충분히 동조 받을 가치 있는 행동이 되도록 탈바꿈시켜 놓는 것이다. 그럼에도 '열혈형사 강철중이 무엇 때문에 조규환에게 마약을 뿌리고 죽도록 팼어야 했는가'를 알아야 2편의 설정과 강우석 영화의 목적지상주의를 이해하기 쉬워진다. 즉 <공공의 적>의 후반 장면은, 존속살해범이란 확신을 가졌으면서도 비호세력의 방해와 경찰직무의 한계로 인해 조규환을 쉽게 잡아넣을 수 없음에 절망하고 분노한 강철중이 할 수 있는 극대치의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이것이 2편이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 형사소송법 차원에서 본다면 경찰의 한계를 드러낸, 다시 말해 검사만이 공소권을 가진다는 ‘기소독점주의’ 앞에서 주저앉은 영화가 <공공의 적>1편이었기에, 이를 해결할 방법은 강력계 형사 강철중의 신분을 수직 상승시켜 그에게 공소권을 쥐어주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2편에서 강력부 검사가 되어 돌아온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 잘못된 과거사 청산을 위한 열쇠인 국새를 찾기 위해서 대통령은 초법적인 결단으로 발굴사업에 힘을 실어주더니 몸소 발굴현장에 순시까지 감행하고 있다. 따라서 목적을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의 절대 권력동원은, 앞서 말한 영화가 주장하는 바를 전달하는데 주력하면서도 영화적 긴장과 극적이벤트를 노리는 강우석 영화의 특징과 무관치 않다.


문제_ 셋. 지배적 독해의 요구: 관객을 얕잡아 본 과도한 자신감

사회 각 다른 계층들은 서로 다른 능력과 성향을 지니고 서로 다르게 인지하고 분류하고 기억하기 마련이다. 이 의미는 각기 다른 집단들은 다른 방식으로 문화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문화가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을 인식할 때, 강우석의 <한반도>는 시류에 편승하고는 한국관객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안일한 사고에서 만들어진 졸속영화임이 드러난다. 이것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호명하는 방식에 대한 사고결여에서 비롯되는데, 다시 말해 <한반도>는 국민적 반일감정과 과거사청산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객관적 조건은 충분하나, 주관적 조건이 결여되어 있음을 간과한 채 만든 영화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가 지닌 치명적 약점은 ‘영화가 역사를 호명하는 방식에 있어 얼마나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기본을 무시한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러한 영화와 역사성의 조우에 대한 몰이해가 위험한 까닭은, 반일감정이 보편적 국민정서라는 점에서는 동조를 얻을 수 있지만, 시민 개개인과 정치권, 이해당사자의 주관적 시각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는 총론찬성, 각론반대라는 다양성을 무시한 채, 과거사청산이라는 목적 하에서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는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대통령이 지명하여 인준한 총리로 하여금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르게 만들며, 국정원 서기관이 최고책임자의 명령을 거부하고, 일본 구축함의 진로후퇴 소식에 (마치 임진왜란을 다룬 드라마에 나오는 수군의 환호장면과 같은) 갑판에서 환호하는 한국해군의 모습 등이 버젓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기억과 주관적 기억의 간극을 메우지 못할 때,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할 때, 또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확실한 기제가 상실되었을 때, 영화는 필패하기 마련임을 이 영화는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문화산업의 이데올로기가 지닌 힘은 관객이 자각능력을 잃고 순응적으로 된다. 영화는 전체주의적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조건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영화는 문화산업의 일부로 자리하면서 관객을 소비자로 재생산하려는 목적의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다. 이때 관객은 지배적 독해를 요구받기 마련인데, 결국 영화에 대한 판단과는 무관하게 산업적으로 기획된 마케팅의 결과물로서의 영화를 접하는 동안 길들여지고 익숙해짐으로써 비판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즉, 블록버스터에 가까운 영화일 수 록 영화 속 시민대중의 모습은 약화되고 지배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영웅들이 활보하기 마련이며 선과악의 이분법적 구조 하에서 스테레오타입의 캐릭터가 강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경우로 돌아가서, 을사오적의 이적행위에서 발로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과연 민중은 어디에 위치했으며, 당시 민중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현재 한국사회의 시민의식은 어느 정도인가. 라는 최소한의 고민 없이 영화가 만들어질 때, 영화는 관객에게 지배적 독해만을 요구할 뿐이라는 점이다.

일본과의 과거청산을 반대할리 만무한 국민정서에 의존한다고 치더라도, 정작 국민대중은 영화 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국민대중의 실종은 반일과 민족주의에 당연히 동조하리라는 과도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영화 속 시민대중이라고 해봐야, 대통령 내외가 찾은 음악회장에서 보이는 열렬한 박수부대와 역사의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것으로 묘사된 무식한 강남주부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영화의 주체적 인물들(행정부각료와 최민재, 이상현외 작전수행 군인들)이외의 등장인물이라고는 하나 같이 단순한 노동계급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사청산과 극일이라는 첨예한 사안 앞에서 민족주의자 대통령의 결단은 옳은 것이며, 시민대중은 당연히 동조해야 마땅하다는 전근대적 가치관에 다름 아니다. 그러하기에 왕의 칙명을 받들어 목숨을 걸고 국새를 숨긴 내관의 후손은 도굴범으로 전락해 있고 그는 발굴현장에서 땅을 파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나머지 인물들 역시 발굴현장에 잡부이거나 땅을 파는데 열심인 소방대원들일 뿐이니, 그들에게서 국새의 의미나 과거사청산에 대한 인식을 찾을 수 없듯이, 회의나 반론을 제기하는 이도 없다. 이러한 단편적인 캐릭터로 이루어진 영화 앞에서 관객의 생각이 개입할 여지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며, 그래서 지배적 독해를 요구하는 영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한말 무기력하거나 사악한 대신들과 오늘의 현재 정치상황을 중첩시켜 놓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매하고 무지한 대중은 고작 권력과 지배이데올로기의 하명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안일하고 무모한 인식은 혀를 내두르게 만들 따름이다.


문제_ 넷. 영리한 이중전략

앞서 거론한 이유 외에도 영화기획과 형식에 대한 이중전략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한반도>는 과거사청산에 대한 극우민족주의의 과잉과 진보개혁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구시대와의 결별을 부르짖고 있음에도, 정작 영화의 형식과 진행과정은 지극히 보수적 정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미 한국영화관객이 보여준 사례, 즉 의식은 진보적이지만 행동은 보수성을 유지하고 있다는데 기인하는 것이며, 이러한 기반을 근거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딛고 강우석식 상업영화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영화산업측면에서 볼 때 현재 한국영화의 위치는 관객대중의 의식성향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라기보다는 배급과 마케팅의 효율적 전략의 산물로 보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바로 이 지점에서 철저하게 기획된 상업적인 영화로서의 <한반도>의 영화적 위치가 확정된다. 사회문화 담론과 트렌드를 창조하는 공간이 20대-30대의 주 활동무대인 인터넷인데 반해, 그것이 검증과 분석을 거쳐 실재화 되는 공간은 여전히 오프라인이라는 점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진보개혁성향의 대통령으로 하여금 첨예한 일본문제를 정면 돌파하게 만듦으로써 젊은 관객의 호응을 끌어냄과 동시에, 중년 관객에게는 일제잔재 청산의 장애물을 드러내놓고 공론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리는 강우석의 불온한 상상으로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남겨진 과제 - 기로에 선 강우석의 영화

앞서 말했지만, 강우석의 영화는 사회풍자 코미디에서 빼어난 능력을 발휘해왔다.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의 아류에 머물던 시절, 그가 만든 영화들은 한국코미디가 더 이상 저질이 아님을 인식시켰고, 오락성과 해학 넘치는 이야기로 관객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투 캅스>의 대성공이후 입지가 넓어지면서부터 감독에서 제작자로의 행보이동을 통해 영화계의 핵심파워맨으로, 또한 흥행감독으로 이슈를 만들고 재생산하려는 과욕은 본래의 장기를 잃어버린 채 진지한 사회고발 드라마에 치중하게 만들었다. 코미디가 들어갈 틈이 없었던 <실미도>를 기점으로 그는 장인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 보이고 있지만, 그것이 옳은 선택으로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위험한 도박처럼 보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미 여러 편의 영화에서 보여주었듯이 시류를 읽고 확대재생산하는 능력의 탁월함은 익히 검증된 것이지만, 안일한 역사인식과 더불어 현 정치-사회상황에 대한 단편적 접근방식만으로 완성된 <한반도>를 가지고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대단한 오판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단순하고 명쾌하게 결말지어 답답한 가슴이라도 풀어줬더라면 좋았을 소재가 아니었던가. 하물며 일본의 과거사반성과 통쾌한 복수극으로 위장한 영화의 무게중심이 후반으로 갈 수 록 개혁진보세력과 수구세력의 대치양상으로 이동이라니. 정작 일본을 향한 통쾌한 응징을 그려낼 용기도 없으면서 그 책임을 슬그머니 내부의 적으로 돌리는 비겁하고 영리한 상업영화인 <한반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가 제작과 배급을 기반으로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번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야말로 강우석, 자신이 감독과 제작자의 경계에서 분명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한반도> (2006, 147분)
감독 : 강우석
출연 : 안성기, 문성근, 조재현, 강신일, 차인표,. 강수연, 김상중, 독고영재

 
제휴 네오이마주(neoimages.co.kr)

이 시간 주요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