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자금과 금리
투기자금과 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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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콜금리를 3개월 연속 동결함으로써 한국의 금리가 미국보다 1%나 낮은 상태를 당분간 유지하게 됐다. 환율 급락에 따라 금리 인상을 당분간 유보한다는 것이지만 우리 경제로서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셈이다.

외자유치가 힘들었던 70년대 고도성장기에는 오히려 내자 동원 수단으로 고금리 정책을 유지했다. 살인적 노동시간과 저임금 상태에 놓였던 공단 노동자들도 그 덕분에 소금물에 밥 말아먹으며 악착스레 적금 들면 밭 한 뙈기 없던 고향 부모님에게 농지를 사드리는 효도가 가능했다. 당시 언론은 이런 사례들을 미담으로 추켜세우며 유행으로 만들어 정부와 함께 사실상의 자발적 강제를 공모했다.

반면 수출기업 지원을 위해서는 기업 대출금리를 낮출 수 있는 한계까지 낮추다보니 역마진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곤 했다. 그 때문에 한 때는 빈손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창업 열기가 뜨거웠고 월급쟁이들은 또 그들대로 저리 대출을 받아 주식투자하는 게 유행이 되기도 했다.

빚이 많은 사람이 부자라는 인식조차 널리 퍼져 나갔다. 덕분에 주식시장이 한번 곤두박질치면 적잖은 사람들의 ‘죽네 사네’ 소동을 지켜봐야 했다.

덕분에 대출은 엄청난 특혜로 인식됐다. 창구 직원들의 리베이트 수수 관행이 불법이라는 인식조차 희미할 정도여서 은행 대부계에 있다면 대놓고 부수입이 좋겠다고 말해도 민망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소액이나마 대출을 받기 위해 각종 ‘빽’이 동원되기 다반사였고 그러다 보니 그럴 만한 배경도 없는 서민들로서는 대출을 받는 자체가 대단한 행운에 속했다.

지금도 대출받기가 여의치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담보 여력이 없는 많은 중소기업들은 정부 지원금조차 그림의 떡으로 여긴다. 그래서 지금도 고금리 대부업이 건재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은행 대출 가능성을 수시로 탐색이나마 해보지만 70년대 당시 서민들로서는 워낙 은행 문턱이 높다보니 아예 은행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자금 융통을 하려면 으레 사채시장만을 상대하는 경우가 흔했다.

개인간 돈 거래도 지금에 비하면 참으로 활발했다. 60년대까지는 주로 목돈 마련 수단으로 활용되던 ‘계’가 70년대 들면 계주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변해 종종 대형 계돈 횡령 사고들이 터지곤 했다. 다 은행 문턱이 높아 생긴 사건들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힘든 대출을 엄청난 규모로 받아 그냥 꿀꺽 삼켜버리는 희대의 사기 사건도 잊을 만하면 한번씩 터져 제법 여러 건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돈은 굴리면 커진다는 의미에서 ‘경제는 유통’이라는 희한한 표현을 쓰며 막대한 대출을 받아 그 돈을 이리저리 돌려 투자도 하고 물쓰듯 쓰기도 하다가 결국 쇠고랑을 찬 여성의 뒤에는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남편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보면 금융은 일종의 혈관에 속한다. 자금이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흘러야 하고 또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필요에 따라 고르게 분배돼야 사회 전체가 건강하다. 그 혈관에 이상이 생기면 단순히 혈관의 병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삐걱거린다. 사회의 건강에 긴요한 그 혈관의 건강은 그만큼 더 중요하다.

그 혈관의 건강을 관리하는 일은 참으로 섬세한 솜씨를 필요로 한다. 바늘 구멍만한 틈으로 자금이 새기 시작해도 제 때에 발견하고 처치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가 중병이 든다.

외환위기를 겪고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우리는 섬세하지 못한 금융 관리, 외환 관리의 참혹한 결과들을 실감했다.

지금 우리 환율의 급락은 해외로부터 유입된 투기자본의 규모가 커져서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 판단이 옳든 그르든 우리는 이제 대문 열어놓고 사는 처지에서 어떤 경우에라도 건강을 잃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사회적 기초체력을 기르는 일이 그 무엇보다 긴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나없이 앓는 소리 하기에 바쁜 것은 아닌가 싶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시절보다 엄살은 더 는 것만 같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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