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과 말품꾼들의 훈수값
그린스펀과 말품꾼들의 훈수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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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 국경을 넘어 전세계 금융 흐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앨런 그린스펀이 최근 서울에서 개최된 한 행사에 위성화상으로 등장, 듣기 좋은 한마디를 했다. 서울이 국제금융허브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그린스펀의 얘기인즉 자체적인 큰 시장도 없는 싱가포르와 홍콩이 금융도시로 성장했는데 자체 시장도 있고 모든 선진금융상품이 고루 다 갖춰진 서울이 금융허브가 못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 말 한마디도 그린스펀이 했기에 값이 나간다.

그런데 그린스펀의 그 듣기 좋은 말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꼭 외부인의 한마디를 확인해야 안심하는 유약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입맛이 씁쓸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만한 요소를 파악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그린스펀이 뭘 얼마나 진지하게 검토해보고 하는 소리일리도 없는데 그 한마디에 갑자기 ‘국제금융허브 서울’의 꿈의 무게가 변하는 듯 보인다.

언제부터인지 미국 사회의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던 거물들이 퇴역 후 한국을 방문해 초청자들의 입맛에 맞는 한마디를 던져주고 적잖은 강연료와 그 밖의 부수적인 소득들을 챙겨가곤 했다. 70년대부터로 기억한다. 국내에서 정부의 신뢰가 떨어질 때쯤이면 강연료나 인세 수입으로 지내는 미국의 퇴역 거물들이 방한, 정부가 원하는 한마디를 해주곤 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저들의 강연료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마디 말품 파는 값 치고는 상당히 큰 액수였고 그래서 청년·학생들 사이에서는 독재유지비용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70년대에도 간혹 있었던 일이지만 아무래도 80년대 이후 그런 말품꾼들의 방한이 부쩍 늘어났었지 싶다. 그 무렵에는 미 정계·관계 등의 퇴역 외에 매력적인 미래의 꿈을 파는 앨빈 토플러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들도 방한 대열에 끼어들었다. 책 홍보차 방한하는 길에 강연도 하며 실속을 챙기는 이들의 등장으로 이 때부터 저들의 말품값도 상당히 현실화됐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퇴역 거물들이 초청자 입맛에 맞는 한마디를 해주면 왜 그런지를 의심해보기 전에 우선 고개부터 끄덕이는 추종적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왜 그럴까.

이해득실을 놓고 갈등하는 것은 국내적인 일, 그야말로 집안일일 뿐이고 손님은 그런 갈등에서 객관적 위치에 있는 사람, 중재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 손님이 한마디 하면 이해를 초월한 진실일 것이라는 허망한 착각들을 종종 보이곤 한다.

그렇다면 정말 저들은 객관적일까.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저마다 입장이 다르기야 하겠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말’이 비즈니스 자원인 사람들이다.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저들 사회에도 퇴역 거물들의 경험이나 활용되지 못한 정보, 이력을 상품화하려는 시도들이 활발하게 일어나지만 한국 사회에서와 같은 인맥 중심의 전관예우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우선 효용성이 다한 인물을 옛정을 생각해서 대접한다는 발상이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퇴역들은 저마다 자기 몸값을 높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정보의 값을 높이기 위해 보다 선정적인 팩트들을 가려내고 돋보이게 광고하는 단계를 넘어 간혹은 창작 수준의 윤색을 가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조기퇴직 바람이 거세게 불고 지나간 이후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퇴역들이 조용히 물러나 앉는 일은 보기 어렵게 됐다. 무엇이든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고 소득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런 일들이 미국은 우리보다 월등히 빨리 시작됐다.

그렇게 새로운 일거리로서 말품을 팔고 다니는 이들을 불러다 입맛에 맞는 한마디를 들으려 적잖은 돈을 들이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안심한다. “남들도 그렇다고 하지?”

100여년전 세계사 속에서 당한 왕따의 상처가 아직도 한국 사회, 한국인들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 것인가 싶어 새삼 가슴 아프다. 이제 스스로의 판단을 믿어도 좋을 때가 됐건만 여전히 거울을 들여다보며 묻고 또 묻는다. “누가 제일 옳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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