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서기와 정치
믹서기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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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생활 속에서 종종 삶의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과일주스를 만들기 위해 믹서기에 조각낸 과일을 넣고 돌리는데 단단한 과일이어선지 잘 돌아가질 않는다.

믹서기에는 정지 버튼 외에 강, 약, 순간 작동의 버튼이 있지만 서툰 사용자는 습관처럼 ‘강’ 버튼을 누른 탓에 믹서기의 모터가 헛돈다. 그대로 돌리면 모터에 과부하가 걸려 고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물을 부어야 하나 고민하다 순간 머리가 번쩍 깨는 느낌이 든다.

왜 ‘순간 작동’ 버튼이 있는지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순간 작동을 짧게 몇 번 눌러보니 단단한 과일이 차츰 잘게 부서지며 물을 따로 붓지 않아도 갈리기 시작한다. 이어서 ‘약’ 버튼을 누르니 과육이 곱게 갈리며 내용물이 잘 섞여 걸쭉하지만 먹기 좋은 과일즙이 생긴다.

무조건 강하게 밀어붙이면 모든 게 해결될 것만 같은 폭력 숭배 의식이 우리네 심리 기저에 깔려있어 일상생활 속 시시콜콜 분쟁거리들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로 생각이 이어져간다. 국내 정치권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봐도 그렇고 북한과 그 북한을 대하는 국제사회를 봐도 결국 강한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사회적 조화로 나아가지 못하는 근본이유가 아니겠는가.

어떤 사회적 현상도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병리적 현상이 일시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왜곡할 수 있기는 할지언정. 즉, 단단한 것을 부수는 데 꼭 강한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의 반동만을 부른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사는 우리의 사회가 각종 병리적 현상을 보이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대통령 선거기간 중에는 부드러운 여성적 이미지를 강조하며 높은 지지를 받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통치철학을 강조하며 야당을 압박하는 모습에서는 그의 아버지 박정희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나온다. 그러지 않아도 가뜩이나 방송에서 “박대통령은...” 하고 나오면 가슴 철렁해진다는 박정희 시절의 트라우마 증상을 말하는 이들이 적잖은 판인데.

우리의 기억 속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늘 강하고 단단한, 그래서 타협이 불가능한 독재자의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의 시대 18년간 이룩된 경제성장의 성과를 먼저 생각하는 이들조차도 그에게서 부드러움이나 타협의 여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과정 중 ‘여성’을 강조한 이유의 하나도 그런 아버지 박정희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고집스러움을 되찾았다. 적어도 드러나 보이는 부분만을 보고 평가하자면 그렇다.

물론 개인적 트라우마 때문이겠지만 측근 중 누구에 대해서도 깊이 신뢰하지 못하고 거의 독단으로 총리, 장관 인선을 하는 모습이나 정부조직법 개편을 놓고도 ‘원안고수’라는 원칙에서 제때 한발 물러서는 유연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새 정부 출범을 파행으로 끌고 가는 모습이나 그 모두가 고집불통의 인상을 각인시켜 주는 요인이다.

말로는 국회와 의논하는 정치를 약속하지만 야당은 고사하고 여당조차도 국정의 파트너로 존중하기 보다는 대통령을 도와주어야 하는 조력자 이상으로 대접하는 것으로는 보이질 않는다. 국회와의 논의에 힘을 쓰는 대신 강경한 어조의 대국민 담화를 통해 직접 국민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정치를 무력화시키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 박정희의 재판이라는 인상이 절로 들게 한다.

게다가 북핵 문제가 당면한 현안이라고는 하나 각료 임명에 육사 출신을 대거 기용하며 안보의 핵심은 군을 위주로 한 강력한 통치체제 구축으로 나아가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런 행정 구조를 갖고 남북대화의 의지를 피력하는 것은 그 진정성을 믿기 어렵게 한다.

물론 강할 때는 강해야 하지만 강한 드라이브만으로는 결코 대선기간 중 천명한 국민통합이 가능해지기 어렵다. 말 타고 앞장서서 칼 빼어든 지휘관을 따라 일사분란하게 나아가는 중세 군대와 같은 모습을 국민통합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협상과 타협, 그를 위해 양보하는 모습도 어지간하게는 보여야 한다.

유신시절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할 때부터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권에 나선 이후 오늘날까지 오랜 기간 무비판적 충성에만 너무 익숙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 그 일방적 충성집단을 넘어 온 국민의 다양한 의견과 욕구에 귀 기울여야만 하는 위치에 올랐음을 좀 더 선명하게 자각하기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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