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족주의와 민족경제론
경제민족주의와 민족경제론
  • 홍승희
  • 승인 2004.12.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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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투자펀드인 소버린의 등장으로 SK 경영권의 향배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경제 문제를 민족주의적 이슈로 끌고가려는 시도들이 등장,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SK 경영권을 국내 자본이 지켜야 한다는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삼성의 SK 지분 매집을 소위 백기사의 출현으로 봐야 하느냐 여부로 화제를 모았다.
평가가 엇갈리고 있기는 하지만 삼성과 같은 뿌리를 가진 대형 미디어가 집중적으로 백기사 홍보에 나서며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다.

식민통치를 경험한 약소국 국민들에게 민족이란 매우 가슴 저린 애틋함의 대상이다.
따라서 웬만한 과실은 민족이라는 너울을 둘러쓰면 용서되는 마법을 가능하게도 한다.
특히 아직 식민통치의 후유증이 다 치유되지 않은 사회라면 민족이란 하나의 정서적 뇌관이 된다.
그런 정서가 아직 우리에게는 남아있다.

최근 재벌 기업의 경영권 방어 논리가 바로 그 뇌관과도 같은 민족을 건드리고 있다.
그것도 한 때 진보적이라고 평가되던 경제학자들이 앞장서서 꽤나 자극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일종의 경제민족주의를 주창하고 나서 관심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그 논리를 한꺼풀 벗겨보면 상당히 민망한 실상이 드러난다.
그 민족 속에 재벌은 있지만 절대 다수 국민을 구성하는 노동자나 소비자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간혹 보인다면 그건 인질이 되어 재벌 앞에 방패처럼 서있는 모습 뿐이다.

이 지점에서 과거 민족경제론과 현재의 경제민족주의는 확연히 구분된다.
강대국들에게 무언가 빼앗긴 쓰라린 경험이 다 가시지 않은 우리네 사회에서 누군가 내 떡을 뺏어간다니 실상을 살피고 이치를 따지기 전에 우선 분노하게 되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이다.
하지만 그 떡이 실상 내 떡인지를 확인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노하는 우리는 자각조차 못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2차대전 직전 독일의 파시즘이 생성되던 과정을 떠올려보게 한다.
과도한 1차대전 전비 배상 부담으로 지쳐있던 독일인들에게 파시스트들이 들고 나온 주장, 논리들은 분명히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힘겨운 수습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정도보다 손쉬운 분리 과정만 거치면 스스로의 우수성이 입증되는 파시스트들의 제안에 대중들이 현혹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현재 한국사회는 어느 면에서 파시즘이 태동하던 당시 독일과 유사한 토양이 마련돼 있다.
한국 경제의 몸통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재벌들은 국내 투자를 하지 않고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고용비용을 집중적으로 줄이고 있다.
인력을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강제 퇴직된 이들의 빈자리 중 상당부분은 값싸고 질좋은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채워나감으로써 인건비를 대폭 감축하고 있다.
투자도 않고 인건비는 줄어 지금 재벌기업들은 여윳돈이 넘치지만 사회 전체로는 실직자가 넘치고 가용소득은 줄어들대로 줄어 민간소비가 영 살아나질 못한다.

이런데도 재벌들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요구하며 개혁 중단이 살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과 한 목소리로 대형 언론들은 소위 개혁피로 증후군이 만연돼 국가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다고 외친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가 개혁피로 증후군을 보인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경제민족주의의 수혜자들이 대체로 동일하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그늘을 발견하는 것이 과민반응이기만 할까.
외자유치가 급했던 시절에 외국자본에 주었던 특혜는 물론 거둬야 하고 국내 자본과 외국 자본 사이에 역차별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개선해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외국자본을 적대시하면 지금 다시 구한말 쇄국정책으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글로벌시대에는 기업과 자본의 국적 역시 다중적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외국 투자에 집중하는 한국적 기업과 한국에 집중 투자하는 외국적 기업의 국가경제적 기여도를 보면 그 다중적 성격은 보다 분명해진다.

민족을 얘기하려면 차라리 개성공단처럼 민족을 하나의 고리로 엮어갈 경제공동체를 지향할 일이지 부정한 자본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민족을 들먹일 일은 아닐 것이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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