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즈 가라사대
케인즈 가라사대
  • 홍승희
  • 승인 2004.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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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계획경제가 시작된 이후 20여년을 이 땅에 횡행하던 케인지안들이 80년대 어느 순간부터 슬그머니 근본주의 시장주의자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졌다 싶었다.
그러던 것이 요근래 무기력증을 보이는 한국 경제의 새로운 처방전으로, 세칭 한국판 뉴딜정책이라는 이름을 달고 재등장하고 있다.
케인즈 이론을 토대로 세계적 경제 공황에 대응해 미국이 시행했던 뉴딜정책을 모티베이션한 것이니 한국판 뉴딜정책이라 해서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실상 민간부문의 자발적 창의성이 사그러들 때 케인즈의 처방은 매우 유용해 보인다.
40년전 계획경제가 시작될 때도 민간부문이 스스로 국제사회와 경쟁할 자본 및 사회적 동력을 생성할 수준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케인즈의 지침은 상당한 보탬이 됐다.
자본도 기술도 훈련된 인력도 없던 상태에서 외채에 의존했고 그나마 적은 자본으로 경쟁력 있는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투자를 집중하다보니 소수는 특혜 속에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데 다수는 상대적으로 빈혈 상태에서 별반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의기소침했던 사회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요즘 한국 경제는 사회적 가용 자본 측면에서 보자면 충분한 여력을 지니고 있지만 기업들은 스스로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지를 가늠하지 못한 채 두 손놓고 있는 모양새다.
반면 개인`가계 부문은 가용 자금이 사실상 바닥을 보일만큼 상황이 나빠졌다.
결국 일자리 창출도, 그를 통한 소비진작 나아가 경기회복 모두 정부 몫이 됐다.
당연히 뉴딜을 얘기하고 케인즈를 다시 불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직면해 바라보고 있는 한국판 뉴딜이 루즈벨트의 그 뉴딜과 닮은 듯 하면서도 다르다.
닮을 부분과 닮지 말아야 할 부분이 뒤집어져 수용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루즈벨트의 뉴딜정책 가운데서도 그 핵심 개념은 외면한채 유독 그 수단에 불과했던 대규모 토목사업에만 눈길을 주는 게 아닌가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뉴딜정책의 핵심은 분명 무한대의 기업 자유가 주어진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경제적 재앙 앞에서 국가가 다시 스스로의 역할을 확인하고 사회적 재분배를 시도한 데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기득권 세력들로 사방을 포위당한 정부가 부족한 역량으로 인해 자꾸 알맹이는 놓치고 뒤로 밀리고 있는 모양새다.
물론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면 대규모 토목사업도 좋다.
그러나 그렇게 창출된 일자리가 단순히 수치상의 실업률 감소를 위한 일시적 미봉책에 그친다면 정책적 효과에 비해 후유증이 훨씬 커질 수 있다.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를 벌인 것은 차후 미국 산업 부흥기에 에너지 및 수자원의 안정적 공급에 기여하며 단단한 사회적 인프라로서의 기능을 감당했다.
지금 우리가 펼치려는 대규모 프로젝트는 차후 경제 회생에 어떤 기능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가.
새로 창출된 일자리가 또다른 일자리를 불러오도록 정밀한 계산은 세워져 있는가.
일각에서는 대규모 재정지출이 미래지향적인 IT산업의 토대를 구축하고 또 동원되는 인력이 이 미래산업의 노동력으로 훈련돼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있다.
귀담아 들어도 좋을 제안인 성 싶다.
재정적자 확대를 감수할 필요는 분명히 인정하지만 그것이 끊임없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쓰이지 못한다면 오늘의 투자가 역사적으로는 매우 냉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여론주도층 역시 케인즈의 충고를 다시 들을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케인즈가 했다는 말이다. 무지한 다수의 군중심리가 낳은 타성적 평가는 소수 의견의 갑작스러운 변동으로 말미암아 크게 변화되기 쉽고 시장은 낙관적 감정과 비관적 감정의 물결에 좌우될 것.

그런데 한국의 여론주도층은 어떻게든 비관적 감정으로 이 사회를 출렁거리게 만들기에 혈안이 된 듯 싶다.
실상 60, 70년대의 계획경제가 거둔 최대의 성과는 경제적 미래에 관한 낙관적 전망을 심음으로써 가능했다.
지금은 죽음의 망령처럼 비관주의가 전 사회를 휩쓸며 국가 전체를 백약이 무효인 환자상태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절망에 빠진 환자를 위해 마지막 잎새를 밤새워 그려줄 따뜻한 격려인 듯 하건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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